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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토대 / 이수명(시인)
시의 토대
이수명(시인)
시 되는 일이다. 시를 쓰기 위해서는 그것들로부터 멀어지기를 계속해야 한다. 그들과의 밀착에서 만들어야 한다. 일종의 공황 상태다. 의식은 마비 상태에 가까운 무력증을 드러내고, 두뇌는 잃는 듯이 여겨진다.가진 것을 잃은 것이다. 이는 지각, 감각, 기억, 연상 등을 잃고 사라져 버리는 일이다. 정신이 무장 무기의 형식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이다. 강력한 무기이다. 감각은 새로운 차원의 감각이어서 시각과 청각은 없었던 것들을 포착하며, 인식은 사물들의 경계를 넘나드는 경지로 나아간다. 투시하고, 침투하며, 스며든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교란을 가져온다. 앞에 서서 흔들어 버리는 것, 정신의 전위, 이것이 시의 토대이다. 확보해야 한다. 거칠고, 황량하며, ,바늘 하나 꽂을 수 없게 가꾸어진 정원의 창백한 충만은 시가 들어서기엔 무의미한 황무지에서 보내야 하는 맹목적인, 무차별적인 시간은 정신을 소모시키며, 그러므로 들끓는 정신을 깊이 할 수 있으며, 깊이 들어갈수록 수맥을 만날
이미지는 사로잡으려 하고, 전환이라면, 말에 의한 말의 비판은 막을 수 없는, 커 지향하는 시는 구상에 가까워지고, 말들을 운용하려는 시는 추상에 기울어진다. 않는다. 이렇게 가까이서 오는 그때 그는 멀리서 오는 시를 손을 내밀어 끌어야 하며, 그 예컨대 어떠한 한 순간 혹은 하나의 말을 폭력적으로 가로막거나 잡아채기도 하고, 말들을 새로운 공간에서 혼합, 배양시키기도 하는 것이다. 그는 멀리서 오는 시를 전혀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시가 그 정체를 깨닫지 못한다. 지루한 수작업이 계속 될 대체로 완성된다.그리고 이 과정 자체가 시 속에 녹아 들어 있다. 문을 닫아 걸고 있다. 문을 열고 그 다른 곳을 찾아 다가가지만, 그 다른 곳은 또 다른 곳에 문 앞에서 거절당하고 돌아서기 마련인 것이다. 시인에게는 뇌 속으로 땀이 흐르는 일이다. 하지만 저항이 강력할수록, 강한 폭포수일수록 그것을 역류한 물고기는 생명력이 넘친다.
사물들 구성된 존재임을 나타내는 속도, 움직임 등등.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모여 너머에는 아무 것도 없고, 있다 해도 알 수 없다. 대화를 시도하는 것은 불가능에 것을 지켜보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고, 여러 방향의 상상이 명료할수록 사물의 움직임도 선명하다. 상상은 사물의 집, 존재의 집이다. 집 속에서는 사물들은 침묵이라는 죽음의 외투를 벗는다. 그들은 분주히 이동하고, 넘나들고, 흩어지고, 모여든다. 불투명한 것은 투명해지고, 투명한 것은 그 사물들은 선명하면서도 붙잡을 수 있을수록 사물들은 압도적이면서도 모호하고, 순간적이면서도 다면적인 면모를 다양해지고, 움직임이 풍부해질 사물들은 자신을 발견함으로써 세계를 확장한다. 세계는 더 많은
운율 시에게는 언제나 좋은 직감했을 때 시는 행복하기 때문이다. 또는 운율에 얻었을 때 시는 행복하기 때문이다.
말과 침묵 결합을 돋보이게 하는 시가 브르통의 「자유로운 결합」 같은 시를 들 수 있고, 그리고 세 번째 경우도 있다. 말의 반대편에서 침묵이, 침묵의 반대편에서 말이 오고, 서로를 읽는 듯, 읽지 못한 듯, 무심하게 지나치는 경우이다. 이는 시를 읽을 때 말들의 소용돌이와 무관하게, 관류할 때에 해당된다. 여기에는 미쇼의 「태평한 잉태한다. 말 속에는 말보다 더 말은 침묵을 폭파시키려 하고, 침묵은 말을 폭파시키려 한다. 비대칭을 지향하지만, 다시 말해서 말과 침묵이 하나가 되기를, 침묵으로 말하고, 말로 침묵하기를 원하지만, 이는 관념적인 결합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상 시에서 말이 침묵이 되고 침묵이 말이 되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다. 말은 말을 품을 수 있기 때문이다. 펜을 잡고 언어와 씨름하고 있을 근접하고 있음을 느낀다. 그 접근이 용이치 않아 불만족스러울 갑자기 폭발하듯 언어들이 쏟아져 나오는 경우, 그는 그 덫에서 해방됨을 느낀다. 한 편의 시 앞에서 시인이 느끼는 감정은 사실 이 해방감 외에는 없다. 그는 해방되기 위해 쓰고 또 쓰는 것이다.
대한 형상화의 옷을 필요로 한다. 형상화는 인식에 이르는 길 같은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말이라는 것도 이미 그 자체가 기초적인 단계의 형상화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어떠한 추상적인 본질도 말이라는 매개에 의해서만 모습을 드러낸다. 따라서 말에 의하지 않고는 인식이라는 것 자체가 가능하지 않으므로 인식이란 말에 의해 그려지는 구상화라 할 수 있다. 존재하지 않는다. 말과 함께 떠오르는 이 관념, 포괄적으로 이야기해서 말이 지니고 있는 인식의 측면을 시는 문체, 운율, 형식을 통해 최대한 이용하게 되는데, 그것은 엄격히 말하면 인식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다. 시적 인식이란 통상의 인식의 한계를 넘어서 새로운 인식의 가능성을 포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식이라는 것이 본래 인위적인 관계의 설정, 배치, 반복, 교환, 전환 등의 과정을 내포하는 것이라면 이는 시적 인식에 와서는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그 규모와 규칙이 자유로워진다. 시에서는 아름다움이라는, 미적 이상을 향한 인간 본연의 욕망이, 세계와 사물에 대한 탐구라는 인식의 궁극적인 목적을 자신의 원칙 안에서 조종하고 있기 때문이다. 않으면 현대시이다. 어떤 시가 나이를 먹지 않는 것일까? 기법이나 형식에 있어서,시적 인식의 방향에 있어서 가장 멀리 나아간 경우가 그렇다. 때로 당대에는 너무나 멀리 나아간 것처럼 보이는 시들, 그래서 불길하고, 당대의 가치를 훼손시키는 것처럼 보이는 시들, 하지만 그들로 인해 극지가 있음을 알게 해 준, 스스로 극지가 되어 버린 시들이 현대시이다. 이후 그를 따르는 후대의 시들이 그를 발판 삼아 나아가려 해도 더 이상 거기서 나아갈 수 없을 정도로 자신의 세계를 개화시킨 시들이 시대를 막론하고 현대시라 할 수 있다. 현대시는 발전이 아니라 모방을 낳는 시다. 존재한다. 어느 조류에서든 고독하게 자신의 형식을 실험하고, 정교한 패턴을 구축하려는 노력이 정점에 이르렀다 스러지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현대시는 자신의 존재 양식에 대한 철저한 인식에 기반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현대시라는, 새로운 지형도를 형성하는 것은 언제나 당대의 상황에서 동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 동떨어짐이 앞선 것이었음을 알게 되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 그 동떨어진 곳에서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시 문학사의 줄기가 새로 형성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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