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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쓰기와 자아 찾기 /이은봉(시인, 광주대 문창과 교수)

Author
mimi
Date
2011-08-25 09:43
Views
14293

 


  시 쓰기와 자아 찾기

 

                                                                              
                                                           -이은봉(시인, 광주대 문창과 교수)-

 

 



  1. 언어, 나, 자아발견
 
람은 누구나 태어난 지 2년이 지나면 말을 하기 시작한다. 직접 발화를 하지 못하는 농아도
 두 살이 넘으면 말, 곧 언어 속에서
살아가기 마련이다. 두 살이 넘으면 말을 한다는 것,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언어로 상징되는 사회현실 속에 들어오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사회현실을
형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도구는 말이다. 말이라는 도구가 없는 사회현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라캉은 언어 이전의 삶을 가리켜 상상계라고 하고, 언어 이후의 삶을 가리켜 상징계라고 한다.
결국 전자는 요람의 삶을 뜻하고,
후자는 사회현실의 삶을 뜻한다. 요람의 삶에는 내가 없다.
내가 있다고 하더라도 아직은 주체로 자각되어 있지 않은 '나'라고 해야
옳다. 따라서 상처도
고통도 지각할 수 없는 천국을 살고 있는 것이 요람에서의 '나'의 삶이다.


 
요람에서의 '나'와 사회현실에서의 '나'는 삶의 존재방식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사회현실은
요람과는 달리 생존경쟁이 냉혹하고
살벌하게 전개되는 곳이다. 사회현실을 이처럼 냉혹하고
 살벌하게 만드는 근본원인은 무엇인가. 이론의 여지없이 그것은 언어이다.
언어는 화살촉이
되기도 하고 폭탄이 되기도 하며 '나'의, 개인의 삶을 결정한다. 그렇다. 많은 사람들이 오늘도
 언어 때문에
무서워 떨고, 아파 신음하고 있다.


 
물론 그 반대로 언어 때문에 즐거워 환호하고 기뻐 웃는 사람들도 많다. 이처럼 말은 사람들
 사이를 갈라놓기도 하고 붙여놓기도
한다. 시의 언어도 다를 바 없다. 어떤 시는 '나'라는 존재를
 고통에 빠지게도 하고 어떤 시는 '나'라는 존재를 '행복'에
젖게도 한다.


 
이처럼 사회현실은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던 언어로 가득 차 있는 공간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이 사회현실이라는 공간 속에서 넘치는
언어에 치어 살고 있다. 물론 언어에 치지 않고 언어를
즐기고 향유하며 살아가는 사람들도 없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누구나 언어의
 칼날에 찔려 오랫동안 신음을 해본 체험을 갖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누구인가. 언어를 사용하는 주체는 당연히 '나'일 수밖에 없다. 언제나
나는 '말'을 통해 나 자신 밖의
사회현실 속으로, 곧 세상 속으로 들어가기 마련이다. 세상도
 언어를 통해 내 속으로 들어오기는 마찬가지이다. 흔히 이 때의 나를
개념화하여 '자아'라고 하고,
 세상을 개념화하여 세계라고 한다.


 
언어를 사용하는 주체가 나, 곧 자아라고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언어를 통해 자아는
그 자신의 정체성을 확보해가기 때문이다.
여기서 정체성을 확보해간다는 것은 내가 나라는 의식,
곧 자아의식을 형성해간다는 것을 뜻한다. 자아의식이라는 용어는
자아개념이라는 용어로 불리기도 한다.


 
자아개념은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 더없이 중요한 작용과 역할을 한다. 모든 자아는 자신의 정체성,
 곧 자아개념에 맞게
사회현실과 관계하고 사회현실에서 기능하기 때문이다. 자아개념은 본래 나란
 무엇이고 누구인가, 나란 있는가 없는가 등의 질문과 함께
형성되어 가기 마련이다. 이런 질문과 함께
 하는 자아의 탐구는 우선 자아를 발견하도록 한다.


 
자아를 발견하도록 하는 자아탐구는 타자탐구에서 비롯되는 것이 보통이다. 하나의 개인으로서
자아가 가장 먼저 인식하는 타자는
가족이다. 아버지, 어머니, 형, 누나, 동생들로부터 자아는
처음 타자를 인식하고 경험한다. 타자를 인식하고 경험한다는 것은
주체가 저 자신을 작동시킨다는 뜻이다.


 
죽는 순간까지도 저 자신이 누구이고 무엇인지 반문해보지 못한 사람도 없지는 않으리라.
특히 지난 봉건 시대에는 그런 사람이
대부분이었다는 것이 통설이다. 미처 개인으로서의 자아가
계발되어 있지 못했던 것이 그 시대의 삶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근대
자본주의사회에 와서는
그런 사람이 거의 없어지고 있다고 해야 옳다. 개인의식, 곧 자아의식을 바탕으로 성장해온 것이 근대
자본주의사회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근
자본주의 시대에 와서 '나'는 누구이고 무엇인가 하는 자아에 대한 반문과 인식은 따라서
 필수적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오늘의 근대
자본주의사회를 결코 제대로 살아갈 수 없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무엇보다 그 과정에 개인으로서의 '나', 곧 주체가 바로 설 수
있기 때문이다. 나,
곧 개인이 자신의 삶에 대해 전면적으로 책임을 지는 사회가 근대자본주의 사회이다.


 
근대 자본주의사회에 와서 자아에 대한 반문과 인식은 대강 사춘기를 거치면서 구체화된다.
사춘기를 거치면서 개인으로서 '나'라는
자아는 타자를 인식하게 되고, 그 타자를 통해서 저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는 뜻이다. 따라서 한 인간의 성장과정에 비추어 볼 때
사춘기만큼 중요한 시기는 없다.
사춘기는 자아가 세계로부터 분리되어 독립된 주체로 바로 서게 되는 시기이다. 사춘기에 방황이
 심한
것도 사실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자아와 세계에 대한 반문과 인식을 통해 저 자신의 관점을
만들어 가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자아는 저 자신을 발견하게 되면 누구라도 저 자신을 실현하도록 부추기기 마련이다. 여기서 저 자신을
 실현한다는 것은 사회현실
속에 저 자신을 투여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사회현실 속에
 저 자신을 바로 세우려고 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자아실현은
'나'에 대해 반문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
그리하여 자아를 발견해 가는 사람에게는 숙명적으로 뒤따라오는 성장의 과정이다.


 
그렇다고 해서 자아발견과 자아실현이 시간적 순차에 의해 線條的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자아실현의 과정에 처해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저 자신의 자아를 새롭게 발견하고 깨달아 가는 것이
주체로서의 개인이다. 그것은 시를 쓰는 주체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시를 쓰는 자아, 곧 시인도
 계속해서 자신을 발견하고 깨닫는 동시에 발견하고 깨달은 것을 실현하는 과정을 살아가기 마련이다.


 


  2. 시 속에서의 나, 가공된 자아
 
그렇다면 시를 쓰는 자아, 곧 시인에 의해 씌어지는 시란 무엇인가. 시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정의적 대답은 단일하지 않다.
무엇보다 이는 시에 대한 정의가 수없이 많고 다양하다는 것이 잘

증명해준다. 돌이켜 보면 시에 대한 정의는 시를 바라보는 개인의
관점의 산물이거나 시를 둘러싸고

있는 시대의 상황의 산물일 따름이다. T. S 엘리오트가 시에 관한 정의의 역사는 오류의
역사라고

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시에 대한 정의가 이처럼 한계를 지니고 있다고 하더라도 시가 잘 닦여진,

잘 가공된 언어의
集積物인 것만은 사실이다.


 
언어를 질료로 하지 않는 시란 있을 수 없다. 물론 시가 아닌 '시적인 것'은 언어 이외의 질료에

의해서도 표현이 가능하다.
영상물에 의해서도, 음악에 의해서도 '시적인 것', 이른바 서정적인 것은

생산될 수 있다. 따라서 시적인 욕구, 즉 서정적인
욕구는 언어 이외의 매체에 의해서도 충분히 향유가

가능하다. 시적인 욕구, 즉 서정적인 욕구는 인간의 심미적 通全의 욕구와 맞물려
있는 것으로 본능의

중요한 영역을 차지하고 있다고 해야 옳다.
 
그렇다고는 하더라도 시는 반드시 언어를 바탕으로 하여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언어를 떠난

'시적인 것'은 시가 아니라 말 그대로
'시적인 것'일 따름이다. 시라는 말에는 이미 그것의 질료가

언어라는 뜻이 들어 있다. 여기서 언어를 강조하는 까닭은 시의
언어를 창조하는 주체를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당연히 이 때의 시는 서사시나 극시가 아니라 서정시를 가리킨다. 그렇다면 이 서정시를 쓰는 주체는

누구인가. 당연히 그것은
'나'라는 이름의, 자아라는 이름의 개인이다. 그렇다. '나'라는 개인이 발화한

내용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서정시이다. 이 때의
개인, 곧 시를 발화하는 주체를 흔히 '화자'라고 부른다.

연구자나 비평가의 시각에서 객관적으로 부르면 '화자'이지만 시인 자신의
시각에서 부르면 말 그대로의

'나'일 따름이다. 다름 아닌 '나', 곧 자아가 쓰는 것이 시라는 것이다.
 
새삼스러운 얘기이기는 하지만 이 때의 '나'가 시와의 관계를 통해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시의

안에 들어와 있는 '나'도
나이지만 시의 안에 들어오지 않은 나, 시에 들어오기 이전의 '나'도 나라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실제의 인생을 살아가는
데는 이 때의 '나'가 오히려 훨씬 더 의미를 갖는 '나'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실제의 삶에서 '나'라는 것이 있기는 있는가. 있다면 '나'는 구체적으로 어떠한 모습을 하고

있는가. 나의
존재유무를 논의하기 전에 일단은 '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부터 할 필요가 있다. '나'라는

존재의 실체부터 따져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란 무엇인가. 사람인가. 짐승인가. 짐승이기보다는 사람인가. 아니 사람이면서도 짐승?

'나'란 무엇인가.
정신인가. 물질인가. 물질이기보다는 정신인가. 정신이면서도 물질? 나를 구성하고

있는 질료는 이처럼 단일하지 않다.
 
다시 물어보자. '나'란 누구인가. 시인인가. 학자인가. 학자이기보다는 시인인가. 시인이면서도 학자?

'나'란 누구인가.
교수인가. 선생인가. 교수이기보다는 선생인가. 선생이면서도 교수? '나'란 누구인가.

아들인가. 아빠인가. 아빠이기보다는
아들인가. 아들이면서도 아빠? '나'란 누구인가. 형인가. 오빠인가.

형이고 오빠이기보다는 장남인가. 장남이면서도 형이고 오빠?
나란 누구인가. 악마이기보다는 천사인가.

천사이면서 악마?
 
이처럼 어떠한 '나'도 양자택일적으로, 이분법적으로 존재하지는 않는다. 나는 언제나 복합적으로,

양가적으로, 이중적으로,
다의적으로 흔들리며 존재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자아가 갖는 이런

복합성, 양가성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자아' 밖의
가치를 단일하게 받아들여왔듯이 '자아' 안의

가치도 단일하게 받아들여야 심리적인 안정을 얻는 것이 지금의 사람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처럼

흔들리며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이 '나'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다고는 하더라도 '나'는 정말 가시적으로 있는가. 있다면 언제나 나는 항상 그렇게 있는가.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와
내일의 '나'는 같은가. 아니면 다른가. 말할 것도 없이 같으면서도 다른 것이

'나'이다. 본래 '나'라는 존재는 주체에 의해
인식되는 모든 객관 존재가 그렇듯이 멈춰 있거나 고여 있지

않다. 그때 그때의 상황에 따라 모습을 바꾸며 겨우 존재하는 것이
'나'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나'는

변하고 움직인다.
 
다시 물어보자. '나'는 정말 가시적으로 없는가. 없다면 나는 언제나 항상 그렇게 없는가. 어제도 없고,

오늘도 없고, 내일도
없는가. 없다면 어떻게 없는가. 이미 나는 광어회처럼 엷게 저며져 당신의 입 속에,

위 속에, 장 속에, 살 속에, 핏속에 흐르고
있지 않은가. 나는 이미 한 줌 흙으로, 한 가닥 꽃잎으로,

한 마리 여우로 몸을 바꾸고 있지 않은가.
 
본래 나는 타자와 관계하면서 단지 그 관계의 양상을 통해 존재하기 마련이다. 타자와 접촉하지

않고서는 결코 현현되지 않는 것이
'나'이다. 이처럼 나는 언제나 타자를 통해서만 드러나는 법이다.

내가 없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하나의 현상으로 내가
드러난다는 것은 이미 내가 타자 속에

스며든다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시를 쓰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시를 쓴다는 것은 내가 타자와 지속적으로 관계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시에서의 나는 언제나 타자와 관계를 하는 '나'이이다.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 드러나는 자아가

시에서의 나이다.
 
시에서 나는 타자를 내 속으로 끌어들이기도 하지만 나를 타자 속으로 밀어 넣기도 한다. 따라서

시에서 나와 타자의 관계는
단순하지 않다. 시에서는 이 때의 관계가 하나됨의 세계, 곧 동일성의

세계를 목표로 하기 때문이다. 물론 실제의 시에는 조화와
균형으로서의 동일성의 세계가 이루어져

있지 않는 경우도 없지 않다. 그러나 동일성의 세계에 대한 열망조차 드러나 있지 않은 시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일성에 대한 열망은 나와 타자가 갈등하고 대립하지 않는 세계, 참된 평화의 세계를 목표로 한다는

것을 뜻한다. 물론 이러한
세계는 자유가 흘러 넘치는 파라다이스나 유토피아의 세계를 전제로 한다.

과거의 공간인 파라다이스나 미래의 공간인 유토피아의 세계는
인간이 오랫동안 꿈꾸어온 이상세계를

가리킨다.
 
이상세계를 꿈꾸어온 주체는 말할 것도 없이 개별적인 자아, 곧 '나'이다. 실제의 삶을 돌아보면

이 때의 '나'는 결코 단순하지
않다. 내 속에는 나만이 아닌 수많은 존재들이 함께 살고 있기 때문이다.

내 속에 누가 살고 있다는 것인가. 가족이? 이웃이?
민족이? 자연이? 나아가 하느님이?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이? 아니 하느님의 또 다른 아들 사탄이? 이들과는 다른 코드의 존재들,
그리하여 부처님이 살고

있으면 어떤가? 아니 악귀들이? 아니 이들 모두가 살고 있으면 또 어떤가.

속에 이렇게 많은 존재들이 살고 있으면 어지럽고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것은 당연하다. 현대를 살아가면서
어지럽고 혼란스럽지 않은 자아를 갖고 있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본래 '나'라는 존재는 움직이는 혼돈 그 자체라고 해야 옳다.

 


  3. 참된 나 ; 없는 나
 
복잡하기 짝이 없는 이 '나'라는 이 혼돈에 구태여 질서를 세울 필요가 있을까. '나'라는 존재는

본래부터 혼돈 그 자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혼돈 그 자체를 '나'라는 존재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것 아닌가.
 
하지만 대부분의 '나'는 나 자신을 혼돈 그 자체로 내버려두지 못한다. 혼돈은 내가 아니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니 혼돈이 주는
무질서, 무질서가 만드는 고통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내게 끊임없이 이름을 붙여 '나'라는 질서를 만든다.
'나'라는 질서를 만들면서

나는 비로소 '나'를 살아간다.
 
이 때의 '나'라는 질서로 하여 '나'는 무수한 상처를 만드는 것이 보통이다. 어쩌다 보면 '나'는 상처

자체가 되기도 한다.
여기서의 상처는 '나'에게도 작용하고 '남'에게도 작용한다. 나를 억압하고 남을

억압하는 것이 '나'라는 질서, 상처로서의
질서이다.


 
내가 만든 '나'라는 질서 속에서 상처를 받으며 허우적대며 살아가는 '내'가 참된 '나'일까. 참된

'나'이기 어렵다. 이 때의
'나'는 '나'를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본래 '나'라는 존재는 없으니까.

이미 '나'는 겉으로 드러나는 순간 너이고, 그이고,
세상 자체라는 점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이렇게 변용되는 것은 시 속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시 속에서도 내가 등장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매 편의 시는 매 편의 '나'를 만들기 마련이다. 따라서 한 편의 시를 쓴다는 것은 한 편의 나를 만든다는

것이 된다.
 
서정시는 본래 '나'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독백의 형식이다. 독백의 형식이라는 것은 시적 화자인

'나'의 혼잣말로 시의 언어가
진술된다는 것을 뜻한다. '나'는 혼자서 지껄이고 독자는 몰래 엿듣는

화법으로 전개되는 것이 서정시이다.
 
시를 통해 만들어진 '나'는 시 밖의 '나'가 아니라 시 속의 '나'라고 해야 옳다. 시 속에도 시 밖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얼마든지 분열된 '자아'가 존재한다. 시 속의 '나'가 시 밖의 '나'와 얼마간 다른

'나'라는 것은 이제 의심할 바 없다. 이
때의 '나'는 나에 의해 만들진, 가공된 '나'라는 점을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 너무도 당연한 얘기이지만 시 밖의 '나'와 시
속의 '나'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아닌 '나', 내가 만든 '나'……, 시 속에 존재하는 '나'는 누구인가. 나는 그를 알면서도 모르겠다.

이 때의 '나'는
마땅히 '나'이면서도 '나'가 아니고, '나'가 아니면서도 '나'이다. 시 속의 '나' 역시

끊임없이 변하고 움직이기 마련이다.
10년 전에 쓴 시 속의 '나'와 지금 막 쓴 시 속의 '나'는 다를 수밖에 없다. 시 속의 '나' 역시 정지되어 있는
존재로서의 '나'는 아니다.


 
하지만 시 속의 '나'가 가공되고 제작된 '나', 꾸며지고 장식된 '나'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시 속에 존재하는 '나'는
참 '나'가 아니고 시 밖에 존재하는 '나'가 참 '나'인가. 그렇지는 않다.

시 밖에서도 끊임없이 흐르고 움직이며 가공되고
꾸며지는 것이 '나'이다. 시 속에서든 시 밖에서든

고정된 실제로서의 나는 없다. 시 속에서처럼 시 밖에서도 계속해서 저 스스로를
변모시켜 가는 것이

'나'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시 속에서의 '나'는 본래 이처럼 꾸며지고 장식된 채로 존재한다. 시 속에는 내가 창조한 무수한

내가 散開된 채로 활동하고
있다. 따라서 시를 통해 내가 '나'를 지속적으로 꾸미고 장식하는 것은

당연하다. 시 속으로 들어오는 순간 이미 '나'는 이렇게
저렇게 가공되고 제작될 수밖에 없으니까.


 
이런 점에서 생각하면 시 속에서의 '나'는 하나의 기교이고, 허구일 따름이다. 허구와 기교로서의 나,

일종의 장식으로서의
나……. 시 속에서 나는 항상 대상으로 분산되고 스며들면서 존재한다.

따라서 시인이 선택하는 대상은 그 자체로 나라고 할 수
있다. 시 속에서 내가 이처럼 타자화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시 속으로 들어오는 풍경이나 화폭이 그 자체로 세계관의
선택이 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따라서 시를 쓰는 사람이라면 저 자신을 이렇게 수식하고 위장하는 '나'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삶의 본질, 아니 '나'의 본질이 본래 그렇기 때문이다. 시 속에서의 '나'는 더욱

그렇다.
 
그렇다면 시 밖의 내가 시 속의 '나'를 만드는 것인가. 아니면 시 속의 내가 시 밖의 '나'를 만드는

것인가. 이에 대해서는
단정적으로 대답하기가 매우 어렵다. 실제로는 시 밖의 내가 시 속의 '나'를

만들기도 하고, 시 속의 내가 시 밖의 '나'를
만들기도 한다. 전자의 나와 후자의 내가 상호 상생시켜

가는 것이거니와, 詩作過程이 수양의 한 방법이 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시의 안팎에서 '내'가 이처럼 상호 유추되고 전이되는 것은 매우 흔히 있는 일이다. 뿐만 아니라 순간순간 '나'는 나 밖의
'너'로, 나아가 '그'로 변환되는 가운데 존재한다. '너'로, 나아가 '그'로 존재하면서도 '나'는 '나'로 존재한다. 이것이
시의 안팎에서 '내'가 존재하는 역설이다.


 
이처럼 시의 안팎에서 '나'는 '나'일 수도 있지만 '나'가 아닐 수도 있다. 가공된 인물로서의 나,

제작된 존재로서의 나,
장식되고 꾸며진 주체로서의 나……. 욕망에 쫓기는 나, 허위로 위장된 나…….

그런가 하면 진실로 포장된 나…….
 
이들 '나' 역시 수많은 '나' 중의 하나이다. 수많은 '나' 중의 나……. 물론 그 '나'는 흔히 시 속에서

'진실'을
포획하기 위해 희생되기 일쑤이다. 진실을 드러내기 위한 허구로 존재하기도 하는 것이

'나'라는 뜻이다. 이 때의 '나'가
詩作過程에 끊임없이 저 자신을 깎고 덧붙이고 공글려진 '나'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시가 완성되었을 때 발화자로서의
'나'는 정작의 '나'이든,

배역(시인이 임의로 창조한 화자)의 '나'이든 말갛게 세면을 하고, 곱게 화장을 하기 마련이다.

 


  4. 너이면서도 그인 나
 
'나'일 수도 있고 '나'가 아닐 수도 있는 '나', 그런 '나'를 나는 주저 없이 시에 등장시킨다.

시를 쓰기 시작하는 순간
이미 '나'는 '나'가 아니라 '너'이면서 '그'라는 점을 항상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니, 시를 쓰기 시작하는 순간 이미
'나'는 '너'이기도 하고 '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나'이기도 하다는 점을 유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처럼 시를 쓰기 시작하는 순간 벌써 '나'는 '너'이면서도 '그'이고 나이다. '나'는 나이면서도 너이고

동시에 그인 셈이다.
적어도 시를 쓰는 순간만은 나는 너로, 동시에 그로, 동시에 나로 존재하기

마련이다. 이를테면 시작의 과정에서 '나'는 不二의
존재인 셈이다.


 
이는 시 속에 등장하는 '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그'는 이른바 시적 대상을

가리킨다. 시적
대상으로서의 '그' 역시 '그'이면서 '나'이고, '나'이면서 '그'이다. 물론 이 때의 그와 나는

너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그'는 '나'이기도 하고 '너'이기도 하고 '그'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시 속의 '그'는 단순히 거기 서 있는 '그', 거기 그렇게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그'가 아니다.

시 속에서의 '그'는
충분히 나로서의 '그'이고, '너'로서의 '그'이다. '그'라고 3인칭으로 말하고 있지만

사실은 일인칭의 '나'이고 이인칭의
'너'인 것이다. 이미 '그' 속에는 '나'와 '너'가 투영되어 있고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시 속에서 나로서의 너, 너로서의 나, 나로서의 그, 그로서의 나, 나로서의 나는 때로 여장을 하고 나타나기도 하고, 남장을
하고 나타나기도 한다. 여자이면서도 남자인 나, 남자이면서도 여자인 나, 시 속에서 '나'는 이처럼 탈을 쓰고 끊임없이 '나'를
뒤섞는다.


 
시에서 '나'는 단지 말하는 사람으로만 존재하는 경우도 없지 않다. 시에서 언어를 풀어 나가는 사람,

이른바 시적 화자로서
말이다. 시에서 '나'가 '나'의 모습을 하든, '너'의 모습을 하든, '그'의 모습을 하든,

멀리 떨어져서 굽어보는 전지적인
'신'의 모습을 하든 무슨 상관이 있으랴. '나'가 되고 싶기도 하고

, '너'가 되고 싶기도 하고, '그'가 되고 싶기도 하고,
'신'이 되고 싶기도 하는 것이 시에서의 '나'이다.

1인칭의 나, 2인칭의 나, 3인칭의 나, 나아가 전지자로서의 나로도 변신이
가능한 것이 시에서의

'나'이다. 불가해한 욕망덩어리가 실제로는 '나'라는 인간이 아닌가.
 
어린애가 되어 있는 나, 여성 노동자가 되어 있는 나, 지식인 되어 있는 나, 철공소 황씨가 되어 있는 나,

囚人이 되어 있는
나, 목사가 되어 있는 나, 수녀가 되어 있는 나, 어머니가 되어 있는 나, 할아버지가

되어 있는 나, 창녀가 되어 있는 나,
암탉이 되어 있는 나, 꾀꼬리가 되어 있는 나, 산까치가 되어 있는 나,

암소가 되어 있는 나, 호랑이가 되어 있는 나, 돌멩이가
되어 있는 나, 라면봉지가 되어 있는 나,

강아지풀이 되어 있는 나, 풀여치가 되어 있는 나, 맨드라미꽃이 되어 있는 나…….
시에서 '나'는

감히 어떤 누구도, 어떤 무엇도 감히 될 수 있으면서도 또한 될 수 없다.
 
시 속에는 언제나 이처럼 누구의 목소리로도, 무엇의 목소리로도 등장할 수 있는 내가 흩어져 녹아

있다. 그렇게 녹아 있는
'나'는 무엇을 찾아 움직이고 있는가. 어떤 시간의 물결을 타고 헤엄쳐 다니고

있는가. 중요한 것은 이 때의 내가 도달하고자 하는
곳(것)이다. 그곳(것)을 일러 '나'는 진실 혹은

진리라고 말하고 싶다.
 
오늘의 사회현실에서 진실 혹은 진리라는 것이 있기는 있는가. 많은 사람들이 돈을, 곧 재화를 진실

혹은 진리라고 믿고 있지
않은가. 진실 혹은 진리라는 것이 없으면 또 어떤가. 마음의 순수한 지향이

다름 아닌 진실 혹은 진리가 아닌가. 그것(그곳)을
구체화한 것이 파라다이스이고 유토피아라는

점을 항상 기억해야 할 것이다.
 
흩어져 있는 나, 녹아 있는 나……. 강조하거니와 시 속에는 이처럼 수많은 '나'가 살고 있다. 꼬리를

달고 이리저리 헤엄치는
나, 뱀처럼 잽싸게 미끄러지는 나, 끊임없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나, 춤추고

노래하는 나, 제멋대로 변신하는 나……. 진리를
찾아, 진실을 향해 끊임없이 방황하고 흔들리는 나, 저

수많은 나, 이미 내가 아닌 나, 남이 되어버린 나, 저들은 누구인가.
도무지 알 수 없다.


  이처럼 혼잡한 나, 복수(複數)의 나, 열 개, 스무 개, 서른 개의 목소리를 가진, 머리를 가진 나,

끊임없이 뒤섞이는 수많은 나를 '나'는 생각한다.
 
그 뿐만이 아니다. 이 때의 '나'는 '생각한다'는 것에 대해, 나아가 '생각'에 대해 생각한다. 생각들이

불러일으키는,
그리하여 생각들과 함께 하는 언어에 대해, 언어들이 만드는 時空(시간과 공간, 역사와

사회)에 대해, 그리고 時空이 만드는 진실
혹은 진리에 대해 '나'는 생각한다.


 
또한 '나'는 진리의 껍질에 대해, 껍질들이 만드는 소리에 대해, 소리들이 만드는 리듬에 대해, 리듬들이

만드는 정서에 대해,
정서들과 함께 하는 시의 運氣에 대해 생각한다. 이처럼 시 속에서 '나'는

생각하는 '나'로 존재한다. 생각하는 '나'는 늘
성찰하고 반성한다. 성찰하고 반성한다는 것은 내가 '나'를

고쳐 나가고, 바꿔나간다는 것을 뜻한다. 시 속에서의 '나'는 이처럼
끊임없이 '나'를 향상시켜 나간다.

시 쓰기가 자아 찾기, 나아가 자아를 琢磨하는 일이 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리하여 다시 '나'는 생각한다, '나'가 뒤죽박죽 만드는, 뒤얽혀 만드는 시라는 존재에 대해, 시라는

예술에 대해……. 이런
과정에 '나'는 세련되고 정련되어 가는 법이다. 이처럼 시 쓰기는 자기를

훈련시키고 단련시키는 한 방법, 곧 자기수양의 한 방법이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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