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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쓰기와 자아 찾기 /이은봉(시인, 광주대 문창과 교수)
시 쓰기와 자아 찾기
1. 언어, 나, 자아발견 사 람은 누구나 태어난 지 2년이 지나면 말을 하기 시작한다. 직접 발화를 하지 못하는 농아도 두 살이 넘으면 말, 곧 언어 속에서 살아가기 마련이다. 두 살이 넘으면 말을 한다는 것,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언어로 상징되는 사회현실 속에 들어오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사회현실을 형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도구는 말이다. 말이라는 도구가 없는 사회현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라캉은 언어 이전의 삶을 가리켜 상상계라고 하고, 언어 이후의 삶을 가리켜 상징계라고 한다. 결국 전자는 요람의 삶을 뜻하고, 후자는 사회현실의 삶을 뜻한다. 요람의 삶에는 내가 없다. 내가 있다고 하더라도 아직은 주체로 자각되어 있지 않은 '나'라고 해야 옳다. 따라서 상처도 고통도 지각할 수 없는 천국을 살고 있는 것이 요람에서의 '나'의 삶이다. 요람에서의 '나'와 사회현실에서의 '나'는 삶의 존재방식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사회현실은 요람과는 달리 생존경쟁이 냉혹하고 살벌하게 전개되는 곳이다. 사회현실을 이처럼 냉혹하고 살벌하게 만드는 근본원인은 무엇인가. 이론의 여지없이 그것은 언어이다. 언어는 화살촉이 되기도 하고 폭탄이 되기도 하며 '나'의, 개인의 삶을 결정한다. 그렇다. 많은 사람들이 오늘도 언어 때문에 무서워 떨고, 아파 신음하고 있다. 물론 그 반대로 언어 때문에 즐거워 환호하고 기뻐 웃는 사람들도 많다. 이처럼 말은 사람들 사이를 갈라놓기도 하고 붙여놓기도 한다. 시의 언어도 다를 바 없다. 어떤 시는 '나'라는 존재를 고통에 빠지게도 하고 어떤 시는 '나'라는 존재를 '행복'에 젖게도 한다. 이처럼 사회현실은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던 언어로 가득 차 있는 공간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이 사회현실이라는 공간 속에서 넘치는 언어에 치어 살고 있다. 물론 언어에 치지 않고 언어를 즐기고 향유하며 살아가는 사람들도 없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누구나 언어의 칼날에 찔려 오랫동안 신음을 해본 체험을 갖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누구인가. 언어를 사용하는 주체는 당연히 '나'일 수밖에 없다. 언제나 나는 '말'을 통해 나 자신 밖의 사회현실 속으로, 곧 세상 속으로 들어가기 마련이다. 세상도 언어를 통해 내 속으로 들어오기는 마찬가지이다. 흔히 이 때의 나를 개념화하여 '자아'라고 하고, 세상을 개념화하여 세계라고 한다. 언어를 사용하는 주체가 나, 곧 자아라고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언어를 통해 자아는 그 자신의 정체성을 확보해가기 때문이다. 여기서 정체성을 확보해간다는 것은 내가 나라는 의식, 곧 자아의식을 형성해간다는 것을 뜻한다. 자아의식이라는 용어는 자아개념이라는 용어로 불리기도 한다. 자아개념은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 더없이 중요한 작용과 역할을 한다. 모든 자아는 자신의 정체성, 곧 자아개념에 맞게 사회현실과 관계하고 사회현실에서 기능하기 때문이다. 자아개념은 본래 나란 무엇이고 누구인가, 나란 있는가 없는가 등의 질문과 함께 형성되어 가기 마련이다. 이런 질문과 함께 하는 자아의 탐구는 우선 자아를 발견하도록 한다. 자아를 발견하도록 하는 자아탐구는 타자탐구에서 비롯되는 것이 보통이다. 하나의 개인으로서 자아가 가장 먼저 인식하는 타자는 가족이다. 아버지, 어머니, 형, 누나, 동생들로부터 자아는 처음 타자를 인식하고 경험한다. 타자를 인식하고 경험한다는 것은 주체가 저 자신을 작동시킨다는 뜻이다. 죽는 순간까지도 저 자신이 누구이고 무엇인지 반문해보지 못한 사람도 없지는 않으리라. 특히 지난 봉건 시대에는 그런 사람이 대부분이었다는 것이 통설이다. 미처 개인으로서의 자아가 계발되어 있지 못했던 것이 그 시대의 삶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근대 자본주의사회에 와서는 그런 사람이 거의 없어지고 있다고 해야 옳다. 개인의식, 곧 자아의식을 바탕으로 성장해온 것이 근대 자본주의사회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근대 자본주의 시대에 와서 '나'는 누구이고 무엇인가 하는 자아에 대한 반문과 인식은 따라서 필수적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오늘의 근대 자본주의사회를 결코 제대로 살아갈 수 없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무엇보다 그 과정에 개인으로서의 '나', 곧 주체가 바로 설 수 있기 때문이다. 나, 곧 개인이 자신의 삶에 대해 전면적으로 책임을 지는 사회가 근대자본주의 사회이다. 근대 자본주의사회에 와서 자아에 대한 반문과 인식은 대강 사춘기를 거치면서 구체화된다. 사춘기를 거치면서 개인으로서 '나'라는 자아는 타자를 인식하게 되고, 그 타자를 통해서 저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는 뜻이다. 따라서 한 인간의 성장과정에 비추어 볼 때 사춘기만큼 중요한 시기는 없다. 사춘기는 자아가 세계로부터 분리되어 독립된 주체로 바로 서게 되는 시기이다. 사춘기에 방황이 심한 것도 사실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자아와 세계에 대한 반문과 인식을 통해 저 자신의 관점을 만들어 가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자아는 저 자신을 발견하게 되면 누구라도 저 자신을 실현하도록 부추기기 마련이다. 여기서 저 자신을 실현한다는 것은 사회현실 속에 저 자신을 투여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사회현실 속에 저 자신을 바로 세우려고 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자아실현은 '나'에 대해 반문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 그리하여 자아를 발견해 가는 사람에게는 숙명적으로 뒤따라오는 성장의 과정이다. 그렇다고 해서 자아발견과 자아실현이 시간적 순차에 의해 線條的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자아실현의 과정에 처해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저 자신의 자아를 새롭게 발견하고 깨달아 가는 것이 주체로서의 개인이다. 그것은 시를 쓰는 주체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시를 쓰는 자아, 곧 시인도 계속해서 자신을 발견하고 깨닫는 동시에 발견하고 깨달은 것을 실현하는 과정을 살아가기 마련이다.
정의적 대답은 단일하지 않다. 증명해준다. 돌이켜 보면 시에 대한 정의는 시를 바라보는 개인의 있는 시대의 상황의 산물일 따름이다. T. S 엘리오트가 시에 관한 정의의 역사는 오류의 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시에 대한 정의가 이처럼 한계를 지니고 있다고 하더라도 시가 잘 닦여진, 잘 가공된 언어의 의해서도 표현이 가능하다. 생산될 수 있다. 따라서 시적인 욕구, 즉 서정적인 가능하다. 시적인 욕구, 즉 서정적인 욕구는 인간의 심미적 通全의 욕구와 맞물려 중요한 영역을 차지하고 있다고 해야 옳다. '시적인 것'은 시가 아니라 말 그대로 언어라는 뜻이 들어 있다. 여기서 언어를 강조하는 까닭은 시의 위해서이다. 누구인가. 당연히 그것은 내용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서정시이다. 이 때의 연구자나 비평가의 시각에서 객관적으로 부르면 '화자'이지만 시인 자신의 '나'일 따름이다. 다름 아닌 '나', 곧 자아가 쓰는 것이 시라는 것이다. 안에 들어와 있는 '나'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실제의 인생을 살아가는 모른다. 있는가. 나의 존재의 실체부터 따져볼 필요가 있다는 '나'란 무엇인가. 있는 질료는 이처럼 단일하지 않다. '나'란 누구인가. 아들인가. 아빠인가. 아빠이기보다는 형이고 오빠이기보다는 장남인가. 장남이면서도 형이고 오빠? 천사이면서 악마? 양가적으로, 이중적으로, 복합성, 양가성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자아' 밖의 가치도 단일하게 받아들여야 심리적인 안정을 얻는 것이 지금의 사람들이다. 그러나 흔들리며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이 '나'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와 '나'이다. 본래 '나'라는 존재는 주체에 의해 않다. 그때 그때의 상황에 따라 모습을 바꾸며 겨우 존재하는 것이 변하고 움직인다. 오늘도 없고, 내일도 위 속에, 장 속에, 살 속에, 핏속에 흐르고 한 마리 여우로 몸을 바꾸고 있지 않은가. 않고서는 결코 현현되지 않는 것이 내가 없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하나의 현상으로 내가 스며든다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시에서의 나는 언제나 타자와 관계를 하는 '나'이이다.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 드러나는 자아가 시에서의 나이다. 시에서 나와 타자의 관계는 세계를 목표로 하기 때문이다. 물론 실제의 시에는 조화와 있지 않는 경우도 없지 않다. 그러나 동일성의 세계에 대한 열망조차 드러나 있지 않은 시는 과언이 아니다. 것을 뜻한다. 물론 이러한 과거의 공간인 파라다이스나 미래의 공간인 유토피아의 세계는 가리킨다. 이 때의 '나'는 결코 단순하지 내 속에 누가 살고 있다는 것인가. 가족이? 이웃이? 예수님이? 아니 하느님의 또 다른 아들 사탄이? 이들과는 다른 코드의 존재들, 있으면 어떤가? 아니 악귀들이? 아니 이들 모두가 살고 있으면 또 어떤가. 것은 당연하다. 현대를 살아가면서 본래 '나'라는 존재는 움직이는 혼돈 그 자체라고 해야 옳다.
본래부터 혼돈 그 자체라는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것 아닌가.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니 혼돈이 주는 그래서 '나'는 내게 끊임없이 이름을 붙여 '나'라는 질서를 만든다. 나는 비로소 '나'를 살아간다. 자체가 되기도 한다. 억압하는 것이 '나'라는 질서, 상처로서의 '나'이기 어렵다. 이 때의 이미 '나'는 겉으로 드러나는 순간 너이고, 그이고, 매 편의 시는 매 편의 '나'를 만들기 마련이다. 따라서 한 편의 시를 쓴다는 것은 한 편의 나를 만든다는 것이 된다. '나'의 혼잣말로 시의 언어가 화법으로 전개되는 것이 서정시이다. 경우와 마찬가지로 '나'라는 것은 이제 의심할 바 없다. 이 않으면 안 된다. 너무도 당연한 얘기이지만 시 밖의 '나'와 시 이 때의 '나'는 끊임없이 변하고 움직이기 마련이다. 시 속에 존재하는 '나'는 시 밖에서도 끊임없이 흐르고 움직이며 가공되고 고정된 실제로서의 나는 없다. 시 속에서처럼 시 밖에서도 계속해서 저 스스로를 '나'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내가 散開된 채로 활동하고 당연하다. 시 속으로 들어오는 순간 이미 '나'는 이렇게 일종의 장식으로서의 따라서 시인이 선택하는 대상은 그 자체로 나라고 할 수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시 속으로 들어오는 풍경이나 화폭이 그 자체로 세계관의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따라서 시를 쓰는 사람이라면 저 자신을 이렇게 수식하고 위장하는 '나'를 두려워해서는 안 그렇다. 것인가. 이에 대해서는 만들기도 하고, 시 속의 내가 시 밖의 '나'를 가는 것이거니와, 詩作過程이 수양의 한 방법이 되는 것도 바로 이 제작된 존재로서의 나, 그런가 하면 진실로 포장된 나……. '진실'을 '나'라는 뜻이다. 이 때의 '나'가 잊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시가 완성되었을 때 발화자로서의 배역(시인이 임의로 창조한 화자)의 '나'이든 말갛게 세면을 하고, 곱게 화장을 하기 마련이다.
시를 쓰기 시작하는 순간 안 된다. 아니, 시를 쓰기 시작하는 순간 이미 '나'이기도 하다는 점을 유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동시에 그인 셈이다. 마련이다. 이를테면 시작의 과정에서 '나'는 不二의 가리킨다. 시적 너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시 속에서의 '그'는 사실은 일인칭의 '나'이고 이인칭의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시적 화자로서 멀리 떨어져서 굽어보는 전지적인 , '너'가 되고 싶기도 하고, '그'가 되고 싶기도 하고, 1인칭의 나, 2인칭의 나, 3인칭의 나, 나아가 전지자로서의 나로도 변신이 '나'이다. 불가해한 욕망덩어리가 실제로는 '나'라는 인간이 아닌가. 囚人이 되어 있는 되어 있는 나, 창녀가 되어 있는 나, 암소가 되어 있는 나, 호랑이가 되어 있는 나, 돌멩이가 강아지풀이 되어 있는 나, 풀여치가 되어 있는 나, 맨드라미꽃이 되어 있는 나……. 감히 어떤 누구도, 어떤 무엇도 감히 될 수 있으면서도 또한 될 수 없다. 있다. 그렇게 녹아 있는 있는가. 중요한 것은 이 때의 내가 도달하고자 하는 진리라고 말하고 싶다. 혹은 진리라고 믿고 있지 다름 아닌 진실 혹은 진리가 아닌가. 그것(그곳)을 점을 항상 기억해야 할 것이다. 달고 이리저리 헤엄치는 노래하는 나, 제멋대로 변신하는 나……. 진리를 수많은 나, 이미 내가 아닌 나, 남이 되어버린 나, 저들은 누구인가. 끊임없이 뒤섞이는 수많은 나를 '나'는 생각한다. 불러일으키는, 사회)에 대해, 그리고 時空이 만드는 진실 만드는 정서에 대해, 생각하는 '나'로 존재한다. 생각하는 '나'는 늘 고쳐 나가고, 바꿔나간다는 것을 뜻한다. 시 속에서의 '나'는 이처럼 시 쓰기가 자아 찾기, 나아가 자아를 琢磨하는 일이 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예술에 대해……. 이런 훈련시키고 단련시키는 한 방법, 곧 자기수양의 한 방법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