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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문장이 매력적인 소설들

Author
mimi
Date
2010-08-11 20:35
Views
27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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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날 아침 그레고르 잠자가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침대 속에서 한 마리의 흉측한 갑충으로 변해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는 철갑처럼 단단한 등껍질을 대고 누워있었다. 머리를 약간 쳐들어보니 불룩하게 솟은 갈색의 배가 보였고, 그 배는
다시 활모양으로 휜 각질의 칸들로 나뉘어 있었다. 이불은 금방이라도 주르르 미끌어져 내리 듯 둥그런 언덕 같은 배 위에 가까스로
덮여 있었다. 몸뚱이에 비해 형편없이 가느다란 수많은 다리들은 애처롭게 바둥거리며 그의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이게 대체 어찌된 일일까?’"           

 

 

- 현대소설이 탄생하는 문장은, 이토록 불길하게 시작한다.  


리는 벌레다,라는 명제를 느닷없이 던짐으로써 우리 삶의 조건을 생생하게 드러내보여준다. 내가 <변신>을 통해 카프카를
처음 접하던 그해 여름, 이 첫문장을 몇번이나 다시 읽으며 고전해야만 했다. 고전소설도 아닌 현대소설에서 주인공이 벌레가 되다니!
그 뜬금없음에 무척이나 당황해했던 것 같은데, <변신>을 읽는 내내 카프카의 문장들이 벌레들처럼 징그럽게 느껴졌고, 내
머리 속에 부스럼딱지들이 들러붙는 듯한 이물감에 치를 떨어야 했다.
 카프카의 번역투의 문체는 세상을 낯설게 만들어보였고,  그 낯설음은 나를 타인으로 만들었다. 어느날 나는 비명처럼 절규하듯 외쳐야만 했다. 

 

'이게 대체 어찌된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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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롤리타. 내 삶의 빛이요, 내 생애의 불꽃. 나의 죄, 나의 영혼. 롤-리-타. 세 번 입천장에서 이빨을 톡톡치며 세단계의 여행을 하는 혀끝. 롤.리.타.

 

그녀는 로, 아침에는 한쪽 양말을 신고 서 있는 사 피트 십인치의 평범한 로. 그녀는 바지를 입으면 롤라였다. 학교에서는 돌리. 서류상으로는 돌로레스, 그러나 내 품안에서는 언제나 롤리타였다.


녀 전에 다른 여자가 있었던가? 있었지. 그래 있었지. 사실은 어느 여름날 내가 어느 어린 소녀애를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롤리타는
없었을 것이다. 바닷가 어느 왕자의 궁에서. 아, 언제? 롤리타가 태어나기 전, 그해 여름 내 나이때. 여러분, 멋진 산문체를
얻으려면 언제나 살인자에게 오시오.

존경하는 배심원 여러분, 증거서류 제 1호는 천사들, 뭔가 잘못 알고 있는, 단순하고 날개달린 고귀한 대천사들이 무엇을 시기했는지 보여줄 것입니다. 이 번민에 뒤엉킨 걸 좀 보십시오. "

 

 

- 가장 시적이고 아름다운, 운율이 살아있는 현대소설의 첫문장, 롤리타!


히 첫 세 문장은 그 자체로 시적인 리듬감으로 충만하면서도, <롤리타>의 내용 전부를 들려준다.  내가 이 소설을 읽기
위해서는 얼마만큼의 죄책감이 필요했던가! 읽어서는 안될 것같은, 읽으면 타락해버리고 말 것같았던 <롤리타>. 대구
남문시장 헌책방 골목에서 모음사에서 나온 <로리타>를 펼쳤을때, 눈 앞 환하게 채우는 저 첫문장들때문에 나는 단숨에
<로리타>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그로인해 지금도 사랑하는 이의 이름을 부를때면,  롤.리.타.처럼 천천히 음미하듯이 내
이와 입천장 사이을 떠도는 그 이름을 조용히 읊조리는 버릇이 생겼다.

 

아직도 내 이와 혀 사이를, 그리고 입천장을 끝없이 맴도는 너의 이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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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양로원으로부터 전보를 한통 받았다: <모친 사망, 명일 장례식. 경백(敬白).> 그것만으로써는 아무런 뜻이 없다. 아마 어제였는지도 모르겠다.


로원은 알제이에서 팔십 킬로미터 떨어진 마랑고에 있다. 두 시에 버스를 타면, 오후 중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밤새움을
할 수 있고, 내일 저녁에는 돌아올 수 있으리라. 나는 사장에게 이틀 동안의 휴가를 청했는데 그는 이유가 이유니만큼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좋아하지는 않는 눈치였다. 나는 그에게 이런 말까지 했다. <그건 제 탓이 아닙니다.> 사장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제서야 나는 그런 소리는 하지 말았어야 하는 걸 그랬다고 생각했다. 따지고보면 내가 변명을 할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그가 나에게 조의를 표해주는 쪽이 오히려 마땅할 일이었다. 하지만 아마도 모레, 내가 상장을 달고 있는 것을 보면
조문을 할 것이다. 지금은 어쩐지 어머니가 죽지 않은 것이나 별다름이 없는 듯한 상태다. 장례식을 치르고 나면 확정적인 사실이
되어 만사가 다 공인된 격식을 갖추게 될 것이다. "

  

 

 - 정확히 고 3겨울 방학때였다. 까뮈가 나를 찾아왔다.


은 트렌치 코트에 머리를 위로 넘겨빗어 창백한 얼굴에 담배를 물고서였다. 나는 그에게서 데카당스를 읽었고, 허무를 읽었고, 자유의
빛을 보았던 것 같다. 그리고 <이방인>. 첫문장 '오늘 엄마가 죽었다'는 소설가, 혹은 예술가가 되기 위해서는 모두
후레새끼가 되어야한다는 어떤 평론가의 명제를 생생하게 떠올려주었다. 내 속의 위반과 일탈, 저항에의 가치는 진정 까뮈에게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시지프스같은, 반항인같은 삶. 그리고 바다. 태양. 뫼르소.

 

내가 껍질을 깨고 나오던 그해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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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보다 어리고 쉽게 상처받던 시절, 아버지는 나에게 충고를 한마디 해주었는데, 나는 아직도 그 충고를 마음 속 깊이 새기고
있다.‘남을 비판하고 싶을 때면 언제나 이 점을 명심하여라.’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다.‘이 세상 사람이 다 너처럼 유리한 입장에
놓여 있지 않다는 걸 말이다.’


버지는 더 이상은 말씀하지 않으셨지만 우리 부자(父子)는 언제나 신기할 정도로 말없이도 서로 통하는 데가 있었고, 나의 아버지의
말씀이 그보다 훨씬 더 많은 뜻을 함축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모든 일에 판단을 유보하는 버릇이 생겼는데, 그
때문에 이상한 성격의 소유자들이 자주 나에게 접근하는 바람에 그야말로 지긋지긋한 사람들에게 적잖이 시달려야만 했다. "

 

 

 - 소설도 이렇게 음악적으로 시작할 수 있다.


음악은 '어리고 쉽게 상처받던 시절''아버지의 충고' 등의 단어에서 스며나오는 추억과 낭만의 울림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저
첫문장을 읽을 때면 나는 항상 비틀즈의 <Let it be>를 떠올리게 되는데, <위대한 개츠비>를 읽는
내내 그 선율이 머리 속을 떠나지 않는다. 카프카와 까뮈의 소설이 보여주는 돌발성, 뜬금없음이 우리 삶의 조건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면, 피츠제럴드는 낮고 친근한 어조로 우리 삶의 너머를 가리켜 보인다. 그렇다, 모든 유보는 희망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나는 <위대한 개츠비>의 첫문장에서, 장정일의 <아담이 눈뜰때>의 첫문장이 비롯되었음을 확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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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들이 백보드를 달아놓은 전봇대 주위에서 농구를 하고 있다. 달리고, 환호성을 지른다. 운동화가 골목길에 완만하게 깔린 자갈을
밟거나 비빌 때마다, 아이들의 목소리가 높이 솟아올라 전깃줄 위 푸른 3월의 축축한 대기 속으로 사라져간다. 신사복 차림의 토끼
앵스트럼이 골목길에 다가와 걸음을 멈추고 물끄러미 바라본다. 키가 6피트 3인치나 되는 26세의 사나이다. 키도 매우 클뿐더러
토끼를 닮은 데라곤 별로 없지만, 넓적하고 하얀 얼굴, 해맑은 푸른 눈동자, 작은 코 밑의 입술을 떨면서 피우던 담배를 무는
모습을 보면 그런 별명이 붙을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 별명은 어렸을 때 붙여진 것이다. 그는 그곳에 멈춰 서서 생각한다.
바야흐로 새 세대인 아이들이 나를 밀어내는군.
"

 

 

- '아이들이 백보드를 달아놓은 전봇대 주위에서 농구를 하고 있다.'


설의 첫문장으로 놀라울 정도로 현대적이지 않은가! 그것도 업다이크가 27세 시절에 썼다니, 믿을 수 없다. 27세의 어린 작가가
이토록 놀라운 현대적 문장을 쓸 수 있었던 원인에 대해서 곰곰히 생각해보면서, 미국 대중문화의 영향이라고 나름대로
짐작했다.  미국의 대중문화는 살아있어서 그 속에서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의식을 지배하는 물적 토대, 하부구조를 이루는데, 그것이
그대로 소설을 비롯한 미국인들의 의식구조, 상부구조를 지배한다. 27세의 존 업다이크는 대중문화에 포위되고 눈이 멀어버린 미국의
이성(理性)을 정직하게 인정하면서, 그것을 생생한 문장으로 옮기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대중문화와 그 프로파간다에 저항하기
전에, 우리가 이미 그 대중문화와 프로파간다에 투항하고 있음을 정직하게 인정해야 한다. 상황을 본질적으로 객관적으로 인정하는
태도에서 현대성(Mordenity)는 발생한다.

<
아이들이 백보드를 달아놓은 전봇대 주위에서 농구를 하고 있다 / 운동화가 골목길에 완만하게 깔린 자갈을 밟거나 비빌 때마다,
아이들의 목소리가 높이 솟아올라 전깃줄 위 푸른 3월의 축축한 대기 속으로 사라져간다>, 는 놀라운 문장을 어떻게 쓸 수
있단 말인가!

 

우리가 스스로 조금만 더 정직해진다면, <달려라 토끼>의 첫문장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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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자습실에서 공부를 하고 있으려니까 교장선생님께서 어떤 평복 차림의 신입생과 큰 책상을 든 사람을 데리고 들어오셨다.
졸고있던 아이들이 깨어났고, 각자 정신없이 공부를 하다가 깜짝 놀랐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교장선생님께서는 우리에게 다시
자리에 앉으라고 손짓을 하셨다. 그리고 자습교사 쪽으로 돌아서서 <로제씨>하고 나직이 말씀하셨다.

- 여기 이 학생을 좀 부탁해요. 중등반 2학년에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학업과 품행을 봐서 양호하면 제 나이에 맞는 상급반으로 올려주지요. "

                                            

 

- 소설적 재미와 감동을 버리고 오로지 소설에 대한 학문적 열정을 가지고 읽어야했던 <마담 보바리>.


리고 그 첫문장. 현대소설의 시작은 저토록 나른하고 평범하기 이를데 없는 일상에 대한 묘사로부터 시작하는 것임을, 아주 모범적으로
보여주는 문장. 플로베르는 모던하다. 플로베르라는 이름에서 느껴지는 낡음과 고전의 이미지를,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플로베르는 우리 주변에 나른한 일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내가 보바리다>가 아니라, <내가 플로베르다>라고
이해되어야한다. 저 <마담 보바리>의 첫문장을 프랑스 독자들이 처음 접했을 때, 아마 그들은 플로베르라는
'전위''첨단'의 낙뢰에 맞아 온 머리 속이 새카맣게 타버렸을 것이다.

 

플로베르. 순정. 을유문고. 제2도서관 4층. 가로읽기. 이휘영. 방곤. 인간과 동물의 경계. 소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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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늦은 저녁에야 K는 도착했다. 마을은 깊이 눈에 파묻혀 있었다. 성이 있는 산은 조금도 보이지 않을뿐더러 성은 안개와 어둠에
싸여 있었다. 따라서 큰 성이 있는 것을 알리는 희미한 등불조차 눈에 띄지 않았다. K는 오랫동안 큰 길에서 마을로 통하는
나무다리 위에 서서 희멀건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리고 그는 잠자리를 구하러 갔다. 여관집에서는 아직도 사람들이 자지 않고 있었다. 빈방은 없었으나, 주인은 한밤중에 찾아온
손님에게 당황한 나머지 K를 객실에 있는 짚을 넣은 포단 위에 재우려고 했다. K는 이 말을 수락했다. 농부 몇 사람이 맥주를
마시고 있었으나 아무와도 지껄이고 싶지 않아서 지붕 및 방에서 몸소 짚을 넣은 포단을 가져다가 난로 가까이 깔고 누웠다. 그곳은
따뜻했고, 농부들은 조용했다. 그는 피곤한 눈초리로 좀 살펴보다가 어느덧 잠들어버렸다. 그러나 잠든 지 얼마 안되어서 벌써 그를
깨우는 사람이 있었다. 도회지 사람과 같은 몸차림, 배우처럼 보이는 용모, 가느다란 점, 짙고 검은 눈썹의 젊은이가 주인과 함께
그의 곁에 서 있었다. 농부들도 아직 그 자리에 남아 있었는데 몇 사람은 그 모양을 더 잘 보고 들을 양으로 의자를 돌리고
있었다. 그 젊은이는 K의 잠을 깨운 것을 대단히 미안하다고 사과하면서, 스스로 성의 집사의 아들이라고 자기소개를 하고나서,
다음과 같이 말을 끄집어내었다.

- 이
마을은 성의 소유지입니다. 여기서 살거나 머무는 이는 성안에서 거주하거나 숙박하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일은 성주이신
백작님의 허가 없이는 누구에게도 허락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그런 허가장을 가지고 있지 않을뿐더러 보여주신 일조차 없습니다.
"

 

 

- 내 사랑 카프카!

대학 1학년 시절 나는 온통 카프카에 빠져 있었다. <
변신>에서 비롯된 그에 대한 관심은 이후 <소송>을 거쳐 <성 城>에 이르러 절정에 도달했다.
그러니까, 나는 카프카의 <성>을 대구시청 옆 헌책방에서 단돈 500원에 구했는데, 삼성출판사에서 나온 세계문학전집으로
김정진(金晸鎭) 선생의 번역본이었다. 먼지를 홈빡 덮어쓰고 있던 그 낡은 책의 먼지를 털고 첫장을 넘겼을 때, 거기에는 불안과
공포의 눈동자를 자신의 책을 펼치는 독자를 향해 쏘아보는 카프카의 사진이 있었다. 질겁하면서 펼친 <성>의 첫문장. '
마을은 깊이 눈에 파묻혀 있었다. 성이 있는 산은 조금도 보이지 않을뿐더러 성은 안개와 어둠에 싸여 있었다. 따라서 큰 성이 있는 것을 알리는 희미한 등불조차 눈에 띄지 않았다.'는 문장을 읽을 때, 나는 내 머리 속에서 하나의 오렌지빛 가로등이 밝혀짐과 동시에 밀가루만큼 희고 보드라운 눈송이가 쏟아져내림을 환각처럼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카프카의 <성> 안으로 빨려들어갔다. 그 이후로 나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다.

 

K가 아직도 그 '성'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듯, 나는 아직도 카프카라는 성에서 헤어나오질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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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제가 되어 버린 천재'를 아시오? 나는 유쾌하오. 이런 때 연애까지가 유쾌하오. 육신이 흐느적흐느적하도록 피로했을 때만 정신이
은화처럼 맑소. 니코틴이 내 횟배 앓는 뱃속으로 스미면 머릿속에 으레 백지가 준비되는 법이오. 그 위에다 나는 위트와 파라독스를
바둑 포석처럼 늘어놓소. 가증할 상식의 병이오.

는 또 여인과 생활을 설계하오. 연애기법에마저 서먹서먹해진 지성의 극치를 흘깃 좀 들여다본 일이 있는, 말하자면 일종의
정신분일자말이오. 이런 여인의 반-그것은 온갖 것의 반이오.-만 을 영수하는 생활을 설계한다는 말이오. 그런 생활 속에 한 발만
들여놓고 흡사 두 개의 태양처럼 마주 쳐다보면서 낄낄거리는 것이오. 나는 아마 어지간히 인생의 제행이 싱거워서 견딜 수가 없게끔
되고 그만둔 모양이오. 굿바이.

굿
바이. 그대는 이따금 그대가 제일 싫어하는 음식을 탐식하는 아이로니를 실천해 보는 것도 놓을 것 같소. 위트와 파라독스와…….
그대 자신을 위조하는 것도 할 만한 일이오. 그대의 작품은 한번도 본 일이 없는 기성품에 의하여 차라리 경편하고 고매하리다. "

 

 

 -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이상이 천재임을,

이상의 <날개>만으로도 한국문학사는 충분히 풍요로워질 수 있음을, 한국어로 자유롭게 사고하고 말할 수 있게된 첫번째 소설이 <날개>인 것임을, 그리하여 또 더 말해서 무엇하랴  <날개>가
학에 대한 모든 것이 저장된 거대한 문학적 보물 창고임을, 이 정도의 문장을 쓸 수 있는 자라면 필연적으로 객혈과 함께 요절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내가 보다 더 어리고 미숙하던 시절, 한국근대소설 중에서 이토록 매끄러우면서도 일상적인 문장으로 시작되는 소설을
만날 수 있었던가!  <날개>만큼의 첫문장을 만나기 위해서는 60년대 김승옥의 <서울, 1964년 겨울>과
<무진기행>까지 기다려야만 했으니, 한국의 현대소설이 김승옥으로부터 한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고 할때,
이상(李箱)과 그의 <날개>가 적어도 100년을 앞서 갔던 아방가르드였음을 어찌 의심할 수 있을까?

 

누가, 이상(李箱)을 의심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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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문(空門)의 안뜰에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바깥뜰에 있는 것도 아니어서, 수도도 정도에 들어선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세상살이의 정도에 들어선 것도 아니어서, 중도 아니고 그렇다고 속중(俗衆)도 아니어서, 그냥 걸사(乞士)라거나 돌팔이중이라고 해야
할 것들 중의 어떤 것들은, 그 영봉을 구름에 머리 감기는 동녘 운산으로나, 사철 눈에 덮여 천년 동정스런 북녘 눈뫼로나, 미친
년 오줌 누듯 여덞 달간이나 비가 내리지만 겨울 또한 혹독한 법 없는 서녘 비골로도 찾아가지만, 별로 찌는 듯한 더위는 아니라도
갈증이 계속되며 그늘도 또한 없고 해가 떠 있어도 그렇게 눈부신 법 없는데다, 우계에는 안개비나 조금 오다 그친다는 남녘
유리로도 모인다. "   
           

 

 

 - 저 박상륭의 문장은 소설인가? 시인가? 타령인가? 아포리즘인가? 계시록인가?


리드미컬한 문장들을 보라, 단어와 단어, 문장과 문장 사이의 쉼표들 하나 하나가 숨을 쉬고, 저 긴 문장이 하나의 센텐스로
구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수없이 많은 곁가지의 이야기를 온순하게 길들여진 양떼들처럼 거느리고 있는 장관을. 저 가쁘고도 유장한
리듬은 우주의 리듬이며, 소설적 언어를 넘어선 율려(律侶)일 것인바, 가히 사자의 포효에 여우의 대가리가 갈갈이 찢어지는
선정(禪定)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 정도는 <죽음의 한 연구>와 박상륭이 가지고 있는 놀라움의 지극히 작은 부분일
뿐, 우리는 박상륭이라는 거대하고도 험준한 산맥을 통해 '노벨문학상'이라는 지독한 사대적 컴플렉스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아름답다, 아름답다, 또다시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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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나이 열아홉 살, 그때 내가 가장 가지고 싶었던 것은 타자기와 뭉크화집과 카세트 라디오에 연결하여 레코드를 들을 수 있게
하는 턴테이블이었다. 단지, 그것들만이 열아홉 살 때 내가 이 세상으로부터 얻고자 원하는, 전부의 것이었다. 그러나 내 소망은
너무나 소박하여 내가 국립 서울대학교에 입학하기를 원하는 어머니의 소망이나, 커서 삼성 라이온스에 입단하기를 꿈꾸는 어린
사촌동생의 소망보다 차라리 더, 어렵게만 느껴졌다.


약 그때 나의 소망이 타자기나 화집 내기 턴테이블과 같이 사소한 것이 아닌 거창한 것, 예컨대 대통령이 되는 것이었더라면 나는 
탱크를 몰고 M16을 난사하여 이룰 수도 있었을 것이며 아예 깨끗이 포기함으로써 즉, 그 욕망을 버림으로써 그 욕망을 이룰 수도
있었을 것이다.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의미에서 소망의 깨끗한 포기는 소망의 성취에 다름아닌 것이 되었을테니가. 그리하여
자신의 모든 욕망을 비워낼 줄 알게 된 이는 어느새 자신을 완전히 다스릴 줄 아는 완전한 자유인, 곧 내 자신의 독재자가 되는
것이다.
"

 

 

- 90년대 새로운 소설의 탄생을 알리는 장정일의 사랑스러운 문장.

'
타자기/ 턴테이블'이라는 테크놀로지가 작품 전면에 등장하고, '삼성라이온스'같은 대중문화가 전면에 부각된다. 이런 점에서 장정일은
분명 김승옥과 최인호의 자식이지만, 오히려 테크놀로지와 대중문화에 대한 기호의 정도면에서는 그들을 훨씬 넘어선다. 이러한 몇개의
기호들은 그 자체 대중문화와 테크놀로지에서 자기 동일성을 확보하는 새로운 작가들의 출현을 암시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아담인 눈뜰때>로 인해, 한국문학사는 비로소 '테크놀로지에 눈을 뜬다'.  장정일과 그의 <아담인
눈뜰때>가 없었던들 그 이후 백민석과 김영하와 송경아와 배수아의 등장은 얼마나 쓸쓸했을 것인가? 90년대 벽두 장정일과
'아담'의 출현은, 20세기 벽두 이상과 '날개'의 출현에 견줄만한 한국문학사의 일대 사건이다.  출판된 지
2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지금 읽어도, 전혀 흠잡을 데가 없고 오히려 그 당시의 새로움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아담이 눈뜰때>의 첫문장을, 아아,

 

스무살의 너와 나는 얼마나 사랑했던가!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
차 포스팅하면서 게으름과 같은 몇몇 개인적 사정때문에, 애초에 올리려고 했던 소설들의 첫문장을 다 올리지 못했다가,
오늘(10.18)처럼 많은 블로거님들의 방문을 받고는 미처 다올리지 못한 부끄러움을 심하게 느끼면서 이렇게 2편의 소설을
덧붙인다. 나중에 따로 '첫문장이 매력적인 소설들2'로 올리려했지만, 속편치고 전편보다 나은 경우가 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이렇게 덧붙여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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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수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 로마서 12장 19절



복한 가정이란 모두가 서로 매우 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제각기 불행한 모양이다. 오블론스키의 집안에서는 만사가 뒤죽박죽이었다.
아내는 남편이, 전에 집에 있었던 프랑스 여자 가정교사와 관계가 있었던 것을 알게 되자, 남편에게 그와 한 집에서 살 수 없음을
선언했던 것이다. 그런 상태가 벌써 사흘이나 계속되고 있었으니, 당사자인 내외는 물론이고, 온가족, 심지어 하인들까지도 매우
괴로운 모양이었다. 온 가족과 하인들은 그들이 같이 사는 데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으며, 우연히 같은 객줏집에서 만나게 된 사람들도
그들 오블론스키네 가족이나 하인들보다는 서로 더욱 친밀하리라고 느꼈던 것이다. 아내는 자기 방에서 나오지 않았고, 남편은 사흘째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린 것들은 내던져 두어 온 집 안팎을 뛰어 돌아다녔고, 이미 어제 요리사가 식사시간을 맞춰서
나가버렸고, 찬모와 마부까지도 나가겠다고 봉급을 계산해달라는 판국이었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여주인공이 항상 품고 다녔던 책이 <안나 카레니나>였던가?  


지만 내가 <안나 카레니나>를 읽게 된 것은, 그것보다 조금 앞서서 서정인 선생의 어느 글에서 <안나
카레니나>의 저 유명한 첫 구절‘행복한 가정이란 모두가 매우 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제각기 불행한 모양이다’를 알게
되면서부터였다. 


실히 카프카나 플로베르보다는 현대적이지 못하다. 그럼에도 소설의 전체적인 내용을 압축해서 암시하는, 혹은 안나 카레니나의 파국의
시발점을 간명하게 드러내 보이는 방식과, 해체의 길을 걷게 되는 현대 가정의 운명을 손금처럼 드러내는 내용은 충분히 인상적이다. 
군 입대를 앞두고 불면의 밤을 함께 보내던 <안나 카레니나>는, 톨스토이가 왜 추앙을 받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었고(그것이 또 다른 불면의 원인이 되기도 했고), 첫 문장에 앞서 인용한 <로마서>의‘원수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는 진정 인간이 구원받을 수 있는 복음처럼 다가왔다.


너희는 너희의 삶을 살라, 심판은 내가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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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 나오자, 눈의 나라였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信號所)에서 기차가 멎었다. 건너편 좌석에서 처녀가 일어나 이쪽으로 걸어오더니, 시마무라(島村) 앞에 있는 유리창을 열었다. 차디찬 눈의 냉기가 흘러들었다. 처녀는 차창 밖으로 잔뜩 몸을 내밀더니 멀리 대고 외치듯이, “역장니임, 역장니임!”하고 소리쳤다.

등잔불을 들고 천천히 눈을 밟고 온 사나이는 목도리로 콧등까지 싸매고는 귀에는 모자에 달린 털가죽으로 내리덮고 있었다.

벌써 저렇게 추워졌나 싶어 시마무라가 창밖을 내다보니, 철도 관사처럼 보이는 바라크들이 산기슭에 으스스하게 흩어져 있을 뿐, 하얀 눈빛은 거기까지 가기도 전에 어둠 속에 삼켜져 있었다.    


 

- 대학 1학년 시절 내내, 김승옥 때문에 일본전후문학에 빠져 있었다.


승옥이 그의 어떤 수필에서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 다자이 오사무(太宰治),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의 글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언급했기 때문이었다. 순서는, 다자이가 먼저였고, 그 다음이 미시마였고, 가와바타는 맨 마지막이었다. 다자이의 소설이
소설이전의 소설이었다면, 미시마는 소설이후의 소설이었고, 가와바타가 가장 소설다웠다. 가공이전의 현실, 가공이후의 행동,
가공으로서의 현실.


와바타의 <설국>은 문장, 문학적 상징, 기법 등의 중요성을 그대로 보여준다. 국경/ 긴 터널은 무엇의 이쪽과
저쪽인가? 시마무라은 어디에서 어디로 건너가고 있는가? 삶에서 죽음? 죽음에서 삶? 그렇다면, 눈의 나라에서 왜 밤은 하얘지는가?
그 흰빛은 현실인가, 환상인가? 눈의 나라에 들어서서, 시마무라를 끝끝내 따라오는 어둠은 삶인가, 죽음인가?

소설에서 문장이 작품전체의 분위기, 인물의 심리, 주제와 얼마나 긴밀한가를, 아니 문장이 곧 소설 그자체임을 그대로 보여주던 가와바타, 그리고<설국>!


대학 1학년이 국문과 학회실에서, 황석영/ 조정래/ 김남주 등‘의식있는’작품을 읽지 않고, 허무주의적이고 탐미적인 일본 소설을 읽는다는 비판을 들으면서 읽었던 <설국>. 그리고 훗날의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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