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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삶을 긍정할 것인가?

Author
mimi
Date
2013-01-05 09:55
Views
11457

 












헤겔은
동물을 비웃는다. 동물은 존재하는 직접적인 상태를 자기 힘으로 벗어날 수 없고 다른 동물에 의해서만

벗어난다. 그렇게 벗어나는
일이란 만신창이가 되어 죽음을 맞이하는 일이다. 개가 더 큰 개에게 물려 죽는

방식으로만 자기 자신을 벗어나듯. 반면 인간은
‘내적 부정’을 통해 직접적인 자기 상태를 지속적으로 벗어난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극복해야 할 장애로 여기고, 이 장애를
부정함으로써 발전한다. 난 이보다 더 잘 할 수 있어!

다음 목표는 수학에서 50점 받는 거다!

이렇게 나날이 장애물 같은 자기
자신을 지양하고 자신의 상태에서 벗어나는 과정이다.

바로 이런 사상의 정반대 편에 스피노자의
제자로서 질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가 있다. 들뢰즈는 동물을

이렇게 찬양한다. “동물들은, 비록
필연적으로 서로 죽이기는 하지만, 죽음을 자신 속에 품고 있지는 않다.”

동물은 직접적으로 주어진 자신의 존재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존재를 즐길 줄만 안다. 오로지 버려야만 하는

인간의 어떤 악습만이 내면에서 자신을 부정하고, 니체가 말하듯 자기
존재를 ‘가책’의 대상으로 여긴다. 이 가책은

후에 프로이트에 와서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죄의식’이 된다. 삶은 내면에서 죽음을 선고하는 일,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일과는 거리가 멀며 주어진 존재에 대한 긍정과 기쁨으로 차 있다. 이런 삶에 대한 찬가가

들뢰즈의 철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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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리의 에펠탑과 기념품 점에서 산 에펠탑이 서로 다르지만

             비례 관계인 것처럼 창조자라는 존재와 피조물이라는 존재는

             서로 의미는 달라도 유비적인 관계에 있다. <출처 : NGD>


일의성, 내재성, 긍정성. 존재론의 이 세 가지

개념이 주저 [차이와 반복](1968)에서 들뢰즈의

철학을 특징 짓는다. 이 개념들은 서양 존재론의

또 다른 개념들인 다의성, 탁월성,부정성, 유비 등

을 적수로 삼는다.

 

들뢰즈의 적을 이해하기 위해 다의성에서 출발해

보자. 일의성은 존재란 한 가지 의미로만
말해진다

는 뜻인 반면, 다의성은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닌다는

뜻이다. 가령 창조자라는 존재와 피조물이라는 존재

를 보자. 두 존재는
같은 의미로 서술될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신 존재는 인간 존재보다 탁월

하다. 어떻게 탁월한가? 신을 묘사하기 위해
모든 술

어들을 동원해 보자. 지혜롭다, 덕스럽다 등등. 그런

데 우리가 아는 모든 지혜보다도, 모든 덕보다도 신

은 더 탁월한 것 같다. 즉 신 존재는 우리가 알고 있

는 지혜나 덕 정도에 멈추지 않는다. 그럼 이런 지혜

나 덕 이상의 탁월함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베일에 싸인 탁월성”이다. 신 존재는 악은 물론 아

니요, 덕도 아니고, 그 이상 탁월한 것이지만, 무엇

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요컨대 신 존재는 “~이 아니

다는 부정으로만 정의될 수 있다.” 이 술어도 아니고

저 술어도 아니며, 모든 술어가 신의 탁월함을 기술

하기엔 모자라다. 이것이 ‘부정성’의 의미다.  



또 다른 편에선 신 존재는 피조물보다 탁월하지만, 그 본성을 알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비례적으로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즉 인간과 신 존재는 모두 지혜롭지만 신은 탁월하게 지혜롭다. 인간 존재가 지혜롭다는 말과 신
존재가 지혜

롭다는 말은 서로 다르지만(다의성), 이 두 존재의 지혜 사이엔 비례 관계가 있다. 마치 기념품 점에서 산 에펠탑과
파리

의 에펠탑이 서로 다르지만 비례 관계인 것처럼. 이것이 ‘유비’의 의미다. 창조자라는 존재와 피조물이라는 존재는

서로 의미는 달라도 유비적인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정리하면 대체로 서양 존재론은 존재의 의미의 ‘다의성’에서 출발해, 한 존재가 다른 존재 보다 ‘탁월’하다는 개념을

도입하고, 그 다음 ‘부정성’으로 나가거나 ‘유비’로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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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현세적 존재보다 상위의, 초월적 존재가 있고, 존재들 사이의 위계질서가 있는 것이다. 앞서 말한  개념들

이 정리되기 이전에 이미 플라톤 시대에 이 위계질서는 예고되었다. 현상계의 존재와 그것의 원인이자 모범인 이데

아 사이의 질서 말이다. 이 질서는 두 가지를 함축한다. 하나는 니체가 서양철학의 고질적인 습성으로 지적했듯 위계

상 열등한 이 차안의 세계를 참된 삶이 아닌 것으로 부정하고, 피안에서 참된 것을 찾아 헤맨다는 것. 소크라테스가

죽음을 맞이하며 이데아들 곁으로 간다고 행복해한 데서 볼 수 있듯 이는 삶을 부정하고 죽음을 사랑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스피노자가 말하듯 현세적 존재의 원인인 탁월한 피안의 것의 내용을 우리는 인식하기보다는 ‘상상적

으로’ 채워 넣는 일 밖에 못한다는
것. 가령 햇빛은 우리 피조물을 따뜻하게 해주기 위해 만들어졌으며, 그것을 만든

이는 “왕자나 지고한 입법자” 같은 것이다라는
공상에서 보듯이 말이다.

이 두 가지는 모두 우리 삶의 운명을 공상으로 꾸며진 피안에 맡긴 채 삶을 저 피안의
탁월한 것에 대해 열등한 존재

로 비하하는 일이다. 나아가 만일 어떤 특정 인종이 저 피안의 탁월한 왕자와 자기 인종이 가장
닮았으므로, 나머지

인종은 우리보다 열등하다고 말한다면, 이는 인종주의가 피안의 초월적인 것을 동경하는 존재론의 후원을 암암리


받고서 탄생할 수 있다는 위험을 증언하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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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는 저런 사고방식으로부터 서양존재론을 빼돌려 ‘존재의 일의성’이라는 광활한 대지에서 먹여
살린다. 존재는 여러 가지 의미가 아니라 단 한 가지 의미로만 말해진다(일의성). 존재는 항상 하나의 동일한 의미로 말해진다는
주장의 뜻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들뢰즈는 ‘샛별-저녁 별’의 예를 든다. 샛별과 저녁 별은 의미상 서로 다르지만 그 두 가지는
동일한 존재, 동일한 하나의 별만을 가리킨다. 즉 샛별도 ‘존재하고’ 저녁 별도 ‘존재한다’고 말할 때 여기서 ‘존재’라는 말은
동일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야곱-이스라엘’의 예도 마찬가지이다. 성서 속의 이 인물은 그의 형 에사오와의 관계 속에서는
야곱이라 불리지만 족장으로서는 이스라엘이라 불린다. 여기서 분명 야곱과 이스라엘은 그 의미가 서로 다르다. 그러나 야곱이
‘존재하고’ 이스라엘이 ‘존재한다’고 했을 때 그 ‘존재함’이란 오로지 동일한 한 인물의 존재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일의성은,
존재는 늘 한 가지 의미이며, 그 존재가 말해지는 대상(야곱, 이스라엘 등)은 ‘다의적’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철학사에서는 이
일의성을 구현한 자가 스피노자이다. 스피노자 철학에서 ‘연장(延長)’과 ‘사유’는 서로 다른 의미지만, 동일한 한 존재의
형식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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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에 의하면 빛과 어둠의 차이에서 그

결과물로 하나의 정체성을 지닌 조형물(번개)

이 출현하는 것이지, 하나의 조형물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탁월한 것(이데아)이 먼저 있는 것이

아니다. <출처 : NGD>

 

존재는 늘 한 가지 의미이고, 오로지 그 이름들(또는 형식들)만이 다의적이라면, 존재는 이
형식들의 ‘차이’를 통해서만 언명

된다고 할 수 있겠다. 즉 ‘차이’가 존재를 규정하는 근본 개념이 된다. 이를 쉽게 이해하기 위해
밤하늘의 번개를 예로 들어

보자. 플라톤이라면 현상 가운데 번개가 나타나기 위해선 먼저 번개의 정체성(동일성)에 관한
개념(이데아)이 있어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현상 세계 너머에 탁월한 형태로 있으며, 그 이데아를 분유(分有)받고
있는 현상계의 번개는

이데아보다 열등할 것이다. 이와 달리 들뢰즈에게서는 번개의 동일성(이데아)보다 ‘차이’가 먼저 온다.

번개는
어떻게 생기는가? 바로 빛과 어둠 사이의 ‘차이’에서 생긴다. 빛과 어둠의 차이에서 그 결과물로 하나의 정체성을

지닌
조형물(번개)이 출현하는 것이지, 하나의 조형물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탁월한 것(이데아)이 먼저 있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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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 자체는 여러 의미를 지니지 않고 한 가지 의미만 지닌다. 그리고 사물들의 정체성에 대한
청사진(이데아)  없이

도 ‘차이’가 이 존재로부터 다양한 사물들을 출현시킨다. “차이는 모든 사물들의 배후에 있다. 그러나 차이의 배후에

는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 잘 나타내 주듯, 사물의 발생에서 “차이는 궁극적 단위”이다.

그러므로 차안의 사물들의 원인이라고 사람들이 믿었던 탁월한 피안의 세계는 어떤 자리도
차지하지 못한다. ‘내재성

’이란 바로 이런 부가적인 초월적 세계를 가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또한 이 내재성의 세계엔 ‘부정’이 끼어들 수가 없

다. 탁월한 피안이 없으므로, ‘차안이 아니다’라는 방식으로 피안을 생각할 수 있게끔 해주는 부정성이 사라져 버리


만다. 다음으로 ‘차이’만이 존재를 규정하므로 내재성의 세계 내적인 운동 원리로서 부정성(헤겔의 부정성) 역시

거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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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07년 출간된 헤겔의 [정신현상학]

                타이틀 페이지 <출처 : Wikipedia>


들뢰즈의 차이 개념은 특별히 이 두 번째 부정성, 헤겔의 부정성과 경쟁

관계를 가지고 있다.
차이는 헤겔이 말하는 부정성, 즉 모순이나 대립이

아니다. 헤겔은 세계가 스스로 운동하는 까닭을 “개념의 자기 운동”에서


설명하려고 했다. 스스로 운동하는 이 개념이 바로 부정성이다. 

 

[정신현상학](1807)에서 헤겔은 말한다. “매개란 자기 동일적인 것이 스스

로 운동하는
것이며, 자기와 맞서 있는 자아가 이를 자각하는 가운데 자

체 내로 복귀하는 순수한 부정성으로써, 이 운동을 순수하게 추상화해

본다면 이는 단순한 생성의 운동이다.” 변증법의 핵심을 표현하는 이 말

을 가능한 한 쉽게 설명해 보자. 여러분 모두는 자기 동일적인 한 인간이다.

여러분의 활동은 언제 시작되는가? 여러분이 자신에게 불만을 가질 때다.

거울을 들여다보고 자신을
혐오하면서, 여러 분은 거울 안의 자기에게

말한다. 학교에서(또는 일터에서) 이렇게 능력 발휘를 못하다니! 너는

내가 극복해야 할
장애야. 이 때 여러분 자신과 거울 안에 대상화된 여러

분의 모습 사이를 매개해 주는 것이 무엇인가? 바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에
대한 불만, 혐오의 감정으로 표현되는 부정성이다. 나 자신의 것으

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기에 논리상으로 이 매개 관계의
진면목은

‘모순’이다. 이 모순이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극복하는 운동을

시작하게 한다. 그래서 나의 존재는 더 나은
결과들을 낳는 생성의 운동

속으로 들어간다.

 

‘차이’란 바로 이런 부정성이 아니며, 오히려 ‘비관계’를 뜻한다. 이런 비관계의 예를 찾자면,
스피노자에서 마음과 신체

사이의 아무런 상호영향 없는 ‘병행관계’를 들 수 있다. 빛과 어둠이 병행적으로 있다는 사실에서 번개가 생겨나듯

차이는 부정성이라는 대립(‘나’와 ‘극복해야 할 나 자신’의 모순)의 운동 없이 사물을 출현시킨다. 부정정과 달리
“차이

는 본질적으로 긍정의 대상, 긍정 자체이다.” 차이는 서로 차이 나는 항들을 그 자체로 긍정하지, 극복의 대상(부정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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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식 변증법에서는 부정성이 항들을 관계 맺어서 종합된 새로운 항으로 발전하게 해준다.(가령
이렇게. 의식은 하

나이다 -> 경험은 다수이다 -> 의식은 다양한 경험의 종합이다) 반면 차이의 세계에서는 차이 나는
것들이 부정되지

않고, 계속 그 자체로 ‘반복’되면서 사물들을 생산한다. “차이는 반복에 거주한다.” 반복은 무엇보다도 시간적
개념,

즉 ‘되풀이 되는 시간’이며, 주어진 상태들의 긍정을 조건으로 한다. 주어진 상태들을 긍정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부정의


대상, 즉 지양의 대상이 될 것이고 따라서 다시 되돌아오는 일, 곧 반복은 없을 것이다.

생활 속에서 반복을 통한 생성의 예를
찾아보자. 아마도 반복을 통해 완성되는 음악, 무용, 시의 선율이나 후렴구는

반복이 사물의 생산에 관여한다는 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일 것이다.

 

또 다른 예로 이 [철학의 숲]  '프로이트'
편에서 살펴본 ‘트라우마(외상, 外傷)’의 경우가 반복을 통한 생성을 보여

준다. 거기서 분석했던 엠마의 경우, 사춘기 이전에
일어난 성추행 사건(상점 주인이 옷 위로 몸을 만진 사건)은 그

자체만으로는 아무런 증상으로도 연결되지 않는다. 두 번째 사건(옷
가게 점원이 웃은 사건) 안에서 요소들(상점,

옷 등)이 반복되자 비로소 트라우마가 발생한다. 즉 “두 개의 인자가 모여 한
병인(病因)을 완성시킨다”는 프로이트의

말은, 들뢰즈 식으로 쓰면 ‘반복이 하나의 병을 출현시킨다’가 된다.(이렇게 [차이와
반복]에서 프로이트는 반복의 중

요한 사례로 제시되지만, 후에 1970년대 정치철학적 작업 속에서는 오이디푸스의 보수성과 관련하여
비판의 대상으

로 떠오른다.)

  

반복은 또한 기쁨과 성숙의 문제이기도 하다. 반복을 통한 구원은프루스트 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근본주제를 이룬다. 어려서 맛보았던 차와 마들렌
을 다시 반복했을 때의 기쁨을 탐구하는 것이 이 긴 이야기의 처음이며 끝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식의 반복을 통한 기쁨과 성숙의
문제를 우리 문학에서 찾자면, 김경주의 시집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2006)에서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반복에 관한
이런 구절을 시집에서 읽는다. “나는 어느 유년에 불었던 휘파람을 지금 창가에 와서 부는 바람으로 다시 본다.” ‘다시’ 보는
일, 곧 반복이 여기서 핵심을 이룬다. 이 반복의 경험과 관련해 시인 김경주는 이렇게 말한다. “제 시의 중요한 코드 중에
휘파람이 있는데요. 어린 시절 대중탕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거리에서 아버지가 불던 휘파람 소리가 신기했어요……언젠가 타이의 시골로
여행을 갔는데, 화장실에서 취해 휘파람을 불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이국의 골목에서 그 옛날 아버지가 분 휘파람을 만날 수
있겠구나……그런데 제가 아버지의 휘파람을 만나고도 못 알아보면 너무 억울해 오열할 것 같았어요.” 과거의 휘파람은 현재의
휘파람이나 바람 속에서 반복된다. 여기서 과거 시간에 뒤늦게(사후적으로) 의미를 부여해주고 그것을 소중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 바로
반복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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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을 통해 완성되는 무용은 반복이

사물의 생산에 관여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다. <출처 : NG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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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들뢰즈는 정신분석학자 가타리와 함께 유명한 책 [앙띠오이디푸스](1972)를 세상에
내놓는다. 정치철학서

이자 정신분석을 비판하는 이 작품은 17세기 스피노자가 [신학정치론](1670)에서 제기했던 물음을 당대의
정치적 환경

속에서 이어받고 있다. “인민은 왜 자신의 예속을 영예로 여기는가? 왜 인간은, 예속이 자신들의 자유가 되기라도 하듯

그것을 ‘위해’ 투쟁하는가?” 물리적 억압을 동원하는 제도적인 장치들은 개개인의  내면에서 자발적으로 이루어지는

예속 없이는 결코
성공적으로 기능할 수 없다. 결국 그것들이 인간본성에 위배된다는 것이 드러나면서 와해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도적 억압의
성공은 그 요인을 개개 인간 내면에서 물어야 한다. 왜 사람들은 예속을 원하는가?

스피노자 시대에는 여러 형태의 교회가 사람들의
영혼을 가두는 감옥이었다면, 들뢰즈 시대 유럽에선 정신분석학이

그 역할을 했다. 오이디푸스에 반대한다는 뜻의 저 작품 제목 ‘앙띠오이디푸스’가 알려주듯, 내면적 예속은 부성적

(父性的) 법에 의해 우리 마음이 ‘부정적으로’ 매개되는 데서 이루어진다.(오이디푸스란, 부성적 법의 금지를 통해

죄의식과 함께 어머니에 대한 욕망을 발생시킨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문제는 이런 오이디푸스의 작동이 단지 개개 가정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세계사 속으로
펼쳐진다는 것이다. 역사

속에서 오이디푸스의 역할을 담당했던 것을 찾자면 이른바 ‘위대한 인간’이 그것이다(가령 독재자들).
프로이트는

[인간모세와 유일신교](1939)에서 사람들은 ‘자연적으로’ 위대한 인간에게 예속되길 원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아버

지 역할을 하는) 위대한 인간이 왜 그렇게 중요한 것이냐고 질문을 할 만큼 어리석지는 않다. 우리는 인간의 집단

이면 어디에든
권위에 대한 강렬한 희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말하자면 사람들은 존경을 보내고, 그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지배를 받든
학대를 받든 강력한 권위자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앙띠오이디푸스]는 바로 이런

견해에 맞서 싸운다. 위대한 인간이라는 갑각류
동물과 여기에 열광하여 예속을 영예로 여기는 대중이라는미친 무척

추동물을 세계사에서 내쫓고자 하는 것이다.

상황은 앞서 살펴본 존재론에서와 유사하다. 존재론에서는 탁월한, 초월적인 원리가
피안으로부터 차안의 존재를

규정하였다. 이 초월적인 원리는 기독교 시대에서는 신이었고, 현대에 와서는 오이디푸스가 된다.
“아버지의 문제는

신의 문제와 같다.” “오이디푸스는 신과 같다. 아버지는 신과 같다.” 바로 이 아버지가 앞서 살펴본 부정성이 기능하

도록 만든다. 즉 오이디푸스 때문에 나 자신은 긍정되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지양되어야 할 것, ‘가책’의 대상으로 만

들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정신분석학은 외부적인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억압에 호응하여 개개인을 내면에서 옭아

매는 학문이라는 것이
들뢰즈의 생각이다. 내 욕망이 아버지 아래서 억압과 금지를 통해 가책의 고통에 시달려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면, 마찬가지로
노동자(아이)로서 나는 영원히 자본주의 체제(아버지) 아래에서 각종 억압

과 금지를 통해 가책을 겪어야만 하는 숙명이다. “아버지,
어머니, 아이는 자본의 이미지의 환영(‘자본 씨, 대지

부인’, 그리고 이 둘의 아이인 노동자)이 된다.” 이런 식의 억압적인
오이디푸스, 부성적 법, 초월적 지배자로부터

차안의 욕망을 해방시키고자 하는 것이 [앙띠오이디푸스]의 과제이며, 그 해방의 결과는 부성적 법 앞에 가책을

느끼는 인격화된 욕망이 아니라, 정체성을 지정 받지 않는 다수의 익명적 욕망의 자유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욕망은

초월적인 법 내지 부성적 법이 제어할 수 없는 힘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초월적 원리에 지배 받지 않고 유목민처럼


‘탈주’하는 이 욕망의 긍정성을 다양한 측면에서 조명하는 작업은 [앙띠오이디푸스]의 후속편인 [천 개의 고원]

(1980)이 떠맡게
된다.

이렇게 들뢰즈 철학은 존재론에서 정치 철학에 이르기까지, 삶을 부정하는 길을 차단하고,
삶을 제물처럼 바치길

원하는 초월적 원리들과 싸우는데 전념한다. 삶은 단지 살라고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지, 가책과 죄의식과 부정을

통해서 단죄하라고 있는 것이 아니며, 저편 어딘가에 있는 최종적인 완성된 단계를 목적 삼아, 훈육 받으며 머무는

열등한 중간
기착지 같은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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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서동욱 / 서강대 철학과 교수
벨기에 루뱅대학 철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강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있으며 [익명의 밤],
[일상의 모험―태어나
먹고 자고 말하고 연애하며, 죽는 것들의 구원], [들뢰즈의 철학―사상과 그 원천],
 [차이와 타자―현대 철학과 비표상적 사유의
모험] 등의 저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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