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들뢰즈는 정신분석학자 가타리와 함께 유명한 책 [앙띠오이디푸스](1972)를 세상에
내놓는다. 정치철학서
이자 정신분석을 비판하는 이 작품은 17세기 스피노자가 [신학정치론](1670)에서 제기했던 물음을 당대의
정치적 환경
속에서 이어받고 있다. “인민은 왜 자신의 예속을 영예로 여기는가? 왜 인간은, 예속이 자신들의 자유가 되기라도 하듯
그것을 ‘위해’ 투쟁하는가?” 물리적 억압을 동원하는 제도적인 장치들은 개개인의 내면에서 자발적으로 이루어지는
예속 없이는 결코
성공적으로 기능할 수 없다. 결국 그것들이 인간본성에 위배된다는 것이 드러나면서 와해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도적 억압의
성공은 그 요인을 개개 인간 내면에서 물어야 한다. 왜 사람들은 예속을 원하는가?
스피노자 시대에는 여러 형태의 교회가 사람들의
영혼을 가두는 감옥이었다면, 들뢰즈 시대 유럽에선 정신분석학이
그 역할을 했다. 오이디푸스에 반대한다는 뜻의 저 작품 제목 ‘앙띠오이디푸스’가 알려주듯, 내면적 예속은 부성적
(父性的) 법에 의해 우리 마음이 ‘부정적으로’ 매개되는 데서 이루어진다.(오이디푸스란, 부성적 법의 금지를 통해
죄의식과 함께 어머니에 대한 욕망을 발생시킨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문제는 이런 오이디푸스의 작동이 단지 개개 가정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세계사 속으로
펼쳐진다는 것이다. 역사
속에서 오이디푸스의 역할을 담당했던 것을 찾자면 이른바 ‘위대한 인간’이 그것이다(가령 독재자들).
프로이트는
[인간모세와 유일신교](1939)에서 사람들은 ‘자연적으로’ 위대한 인간에게 예속되길 원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아버
지 역할을 하는) 위대한 인간이 왜 그렇게 중요한 것이냐고 질문을 할 만큼 어리석지는 않다. 우리는 인간의 집단
이면 어디에든
권위에 대한 강렬한 희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말하자면 사람들은 존경을 보내고, 그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지배를 받든
학대를 받든 강력한 권위자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앙띠오이디푸스]는 바로 이런
견해에 맞서 싸운다. 위대한 인간이라는 갑각류
동물과 여기에 열광하여 예속을 영예로 여기는 대중이라는미친 무척
추동물을 세계사에서 내쫓고자 하는 것이다.
상황은 앞서 살펴본 존재론에서와 유사하다. 존재론에서는 탁월한, 초월적인 원리가
피안으로부터 차안의 존재를
규정하였다. 이 초월적인 원리는 기독교 시대에서는 신이었고, 현대에 와서는 오이디푸스가 된다.
“아버지의 문제는
신의 문제와 같다.” “오이디푸스는 신과 같다. 아버지는 신과 같다.” 바로 이 아버지가 앞서 살펴본 부정성이 기능하
도록 만든다. 즉 오이디푸스 때문에 나 자신은 긍정되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지양되어야 할 것, ‘가책’의 대상으로 만
들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정신분석학은 외부적인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억압에 호응하여 개개인을 내면에서 옭아
매는 학문이라는 것이
들뢰즈의 생각이다. 내 욕망이 아버지 아래서 억압과 금지를 통해 가책의 고통에 시달려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면, 마찬가지로
노동자(아이)로서 나는 영원히 자본주의 체제(아버지) 아래에서 각종 억압
과 금지를 통해 가책을 겪어야만 하는 숙명이다. “아버지,
어머니, 아이는 자본의 이미지의 환영(‘자본 씨, 대지
부인’, 그리고 이 둘의 아이인 노동자)이 된다.” 이런 식의 억압적인
오이디푸스, 부성적 법, 초월적 지배자로부터
차안의 욕망을 해방시키고자 하는 것이 [앙띠오이디푸스]의 과제이며, 그 해방의 결과는 부성적 법 앞에 가책을
느끼는 인격화된 욕망이 아니라, 정체성을 지정 받지 않는 다수의 익명적 욕망의 자유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욕망은
초월적인 법 내지 부성적 법이 제어할 수 없는 힘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초월적 원리에 지배 받지 않고 유목민처럼
‘탈주’하는 이 욕망의 긍정성을 다양한 측면에서 조명하는 작업은 [앙띠오이디푸스]의 후속편인 [천 개의 고원]
(1980)이 떠맡게
된다.
이렇게 들뢰즈 철학은 존재론에서 정치 철학에 이르기까지, 삶을 부정하는 길을 차단하고,
삶을 제물처럼 바치길
원하는 초월적 원리들과 싸우는데 전념한다. 삶은 단지 살라고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지, 가책과 죄의식과 부정을
통해서 단죄하라고 있는 것이 아니며, 저편 어딘가에 있는 최종적인 완성된 단계를 목적 삼아, 훈육 받으며 머무는
열등한 중간
기착지 같은 것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