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이 세상의 혼
시간은 아득한 과거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때는 낮과 밤의 뒤바뀜, 계절의 변화, 가는 해와 오는 해의 반복만이 있었을 뿐이다. 시간은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으니, 사람들이 그것을 알아차리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시간은 오랫동안 이름도 없이 태초의 무(無)로서 존재했을 뿐이다. 우주의 나이가 137억 년이라고 하는데, 그 대부분의 세월 동안 시간은 무였고, 그 무는 무무에서 흘러나왔고, 그 무무는 무무무에서 발원해 흘러나왔을 뿐이다. 초(秒). 분(分), 시(時), 주(週), 월(月), 년(年)이 생겨나면서 시간은 비로소 존재하기 시작햇다. 사람들은 밤하늘에 보름달이 열두번 떠오르면 한 해가 지나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시간은 대체로 차안(此岸)과 피안(彼岸) 사이에 걸쳐놓은 놀라운 가설이다. 시간이 없다면 아무것도 없다. 시간은 무도장인 동시에 음악이다. 움직이는 모든 것과 움직이지 않는 듯 보이는 모든 것은 다 시간이 안무해낸 춤이다. 나의 육체적 삶은 시간이 준 놀라운 선물이다. 시간은 그 놀라운 선물일 뿐만 아니라 때가 되면 그 선물을 회수해 간다. 지구는 태양 주위를 시속 108,000킬로미터로 돌고 있는 생명체들이 탑승한 배다. 시간은 곧 장소이고, 장소는 시간이다. 생명이란 시간의 음악에 맞춰 추는 춤이며, 시간은 우리 세포 속의 DNA에 들어와 다양한 변주곡에 맞춰 춤을 춘다. 결국 우리 삶은 시간의 춤일 따름이니, 시간은 위대한 안무가이자 능란한 춤꾼인 샘이다.
시간은 '지금'으로 흘러 왔다가 끊임없이 '지금'을 지나 또 다른 '지금'을 향해 나아간다. 현재의 '지금'은 없으며, 이미 말해진 '지금'이란 금방 과거 속으로 돌아가버린 '지금'들 뿐이다. '지금'이란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의 기억들이 지각 속에 복귀하는 희귀한 현재를 말한다. 현재란 과거의 발현에 의해 몸을 얻어 드러나는 미래에 지나지 않는다. 없던 것이 갑자기 나타나 과거의 교착이나 잔여물들을 품고 과거-현재라고 주장한다면, 과거는 지나가버린 미래들, 즉 지나가면서 현재라는 사생아를 낳는 미혼모들이다.
너무도 당연하지만 시간은 되돌아오지 않는다. 저 희랍의 한 현자가 말했듯 우리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씻을 수가 없다. 이때 강물은 흘러가는 시간이다. 찰라로 반짝이며 흘러가는 반복을 모른다. 그것은 흘러가버리는 것임으로 붙잡을 수도 없다. 시간이 멈추는 것은 신비의 영적인 순간이다. 우리 삶을 떠받치고 있는 저변들인 시간 속에서 솟구치고 공중에서 흩어지고 잘게 쪼개져 끝내 사라지는 시간이라는 우주적 추상을 뒤뜰, 사계, 이웃들과 함께 한 세상들이라는 실재 속으로 끌어내 우주적 진실과 조우하게 한다. 그래서 시간은 우주공간을 떠도는 이 세상의 혼인 것이다.
- '세상의 혼'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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