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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철학-눈치 보지않고 개성대로 살아가다

Author
mimi
Date
2014-04-07 08:31
Views
9926

눈치 보지 않고 개성대로 살아가다 종욕득자연(從欲得自然)

혜강(嵇康)의 좌충우돌

사람은 자신이 태어나는 시대를 선택할 수 없다. 어떤 시대에 태어나느냐에 따라 격동의 시대를 살아갈 수도 있고 평화의 시대를 살아갈 수도 있다. 우리나라의 현대사를 보더라도 태어나는 시기에 따라 삶이 얼마든지 달라질 수가 있다. 1940년대에 태어난다면 50년대 전쟁의 고통, 60년대 정치의 불안 등을 겪지 않을 수가 없다. 1980년에 태어난다면 90년대 민주 사회의 안정, 2000년대 글로벌시대의 경쟁을 맞이하게 된다.

중국 삼국시대 위나라의 시인이자 철학가였던 혜강과, 그와 뜻을 함께 했던 죽림칠현(竹林七賢)의 초상화.

위진시대 혜강(223~262)은 평화가 끝나고 권력의 중심이 표류하던 시대에 태어났다. 조조와 조비는 후한(後漢)의 마지막 황제 헌제(獻帝)로부터 권력을 인수하여 위(魏)나라를 세웠지만, 사마소와 사마염(司馬炎)은 위나라의 5대 황제인 조환(曹奐)으로부터 권력을 넘겨받아 진(晉)나라를 세웠다. 혜강은 권력이 조씨의 위에서 사마씨의 진으로 넘어가는 위태로운 시대를 살았다. 혜강은 22세에 조조의 손녀 장락(長樂) 공주와 결혼한다. 이로써 혜강의 인생은 현실의 정치와 더욱더 맞물려 돌아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 바로 이 때문에 혜강은 늘 현실 정치와 거리를 두려고 했다. 그는 조씨의 사람이었지만 정치를 멀리함으로써 그 색깔을 지우려고 했던 것이다. 이것은 위기를 헤쳐 나가기 위한 주체적인 결단이었다.

하지만 그의 결단은 도전을 피할 수 없었다. 그의 친구 산도(山濤, 205~283)가 승진하면서 자신의 직책 이부랑(吏部郞)을 혜강이 맡아주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혜강은 이제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밝혀야 할 때에 이른 것이다. 이 제의를 받아들이면 사마씨의 사람이 되겠다는 커밍아웃을 하는 셈이다.

혜강은 산도의 제안을 받고서 장문의 ‘산도에게 보내는 절교의 편지’를 써서 거절의 뜻을 나타냈다. 그는 그 편지에서 감당할 수 없는 일곱 가지와 불가능한 두 가지 이유[必不堪者七, 甚不可者二], 즉 구환(九患)을 제시했다.1)

“늦잠을 자므로 일찍 출근하기 어렵고, 금을 연주하고 낚시를 좋아하여 부하들과 편하게 지내기가 어렵고, 똑바로 앉고 관복 차림으로 인사해야 하니 몸을 긁는 습관을 누르기 어렵고, 글씨를 잘 쓰지도 못하고 글을 잘 짓지도 못하여 공문서 작성이 어렵고, 문상을 좋아하지 않아 조문을 사람의 도리로 치는 시속과 어긋나고 이로 인해 분란이 생기지만 천성을 고치기가 어렵고, 세속적인 사람을 달가워하지 않아서 빈객을 접대하기가 어렵고, 번거로운 일을 참지 못하는데 신경 쓸 일이 많은 공무를 처리하기가 어렵다. 이것이 일곱 가지의 불감당이다. 또 평소 과거의 성왕과 성인을 비판해왔는데 관직을 맡고서 비판을 멈추지 않고, 성격이 직선적이라서 생각나는 대로 말을 뱉는다. 이것이 두 가지의 불가능이다.”

혜강은 아홉 가지의 사유를 들어서 자신이 공직에 어울리는 인물이 아니라는 점을 말하고 있다. 이때 그는 시국과 정치에 대해 한 마디의 말을 하지 않고 개인의 성정과 버릇을 이유로 들고 있다. “나란 이런 사람이니 제발 건드리지 말라!”는 투의 글이다. 물론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라는 말처럼 관직을 맡으면 사람이 바뀔 수도 있다. 하지만 혜강은 “놀라서 스스로 책망해 보지만 천성을 고칠 수 없었다”(瞿然自責, 然性不可化)라고 술회하고 있다. 혜강은 자신을 좌충우돌할 수 있는 인물로 그려서 산도의 제안을 거절했다.

만남과 이별

인생은 타인과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이고 죽음으로 끝난다. 이러한 만남과 이별을 들여다보면 그 사람을 알 수가 있다. 혜강은 산도의 제의를 거절하면서 여전히 정치와 거리를 두려는 뜻을 나타냈다. 이로써 그는 “주방장이 혼자 손에 피 묻히는 것을 부끄러워하여 다른 사람을 끌어들이려는” 산도와 헤어진 것이다.

혜강의 인생에서 굵직한 흔적을 남긴 만남과 이별은 여럿이 있다. 두 가지 정도 살펴보기로 하자. 첫 번째는 형이 입대하여 벼슬로 나아가려고 하자 혜강은 시를 통해 이별의 아픔을 노래했다.

혜강은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형을 믿고 자랐다. 그는 엄한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지 못해서 자신이 버릇없이 굴게 되었다고 할 정도였다. 그는 형 혜희(嵇喜)2)를 아버지처럼 믿고 의지하면서 늘 자신의 곁에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형은 사마씨의 진영에 가담하여 관료로 나아가려고 했다. 혜강은 형의 입대를 말리는 심정을 시에 담았다.3)

“스스로 세속과 관계를 끊고 평생 몸을 다치지 않으려고 다짐했건만
세상사 이리 어려울 줄 어찌 생각했으리오 사냥꾼이 날 잡으러 오네
그물이 구름처럼 사방에 펼쳐져 있고 새 그물 얼기설기 걸려 있네
떨쳐 날아오려고 하나 형편이 좋지 않아 날개를 쭉 펼칠 곳이 없네.”

“새가 없으면 좋은 활은 감춰놓고 지략이 다하면 심신이 위태롭게 되네
길흉은 자신에 달렸지만 세상살이 험하고 험해
어떻게 다시 평복을 입고 덕과 지혜를 가슴에 품고서
맑은 하늘 아래에 한가로이 거닐며 손 맞잡고 오랫동안 서로 따르리오.”
눈치 보지 않고 개성대로 살아가다 이미지 1

혜강은 이 시에서 세상사의 관심을 끊고자 해도 뜻대로 되지 않는 세상살이의 어려움을 읊고 있다. 제 의지와 상관없이 서서히 조여 오는 생명의 위협을 새 잡는 그물에 비유하고는 이어서 그물이 쳐진 곳으로 나아가는 형의 안위를 걱정한다. 또한 지금은 비록 관로로 나서지만 빨리 그만두고 형제가 손을 마주잡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노니는 정경을 바라고 있다. 이별 속에서도 훗날의 만남을 기약하는 강한 염원을 담고 있다.

또 하나는 친구와의 분쟁을 조정하려 했지만 상황이 결국 무고로 진행되자 친구에게 절교를 선언한 일이다. 이 사건은 혜강의 죽음과도 관련이 있다.

혜강은 사방에 쳐진 그물을 피해야 하는 시대를 살면서 가족과 죽림칠현의 친구들을 버팀목으로 삼았다. 하지만 형과 친구들이 자신의 곁을 떠나고, 잘 지내던 여손(呂巽)과 여안(呂安) 이복형제와의 사이에서는 불미스러운 일이 생겼다. 여손이 제수씨와 간음을 한 것이다. 동생인 여안은 이 사실을 알고는 형을 고소하고 처를 내보내려고 했다. 이를 본 혜강은 두 사람을 잘 아는 처지라 중재에 나섰다. 혜강의 설득으로 여안은 고소를 하지 않고 여손도 동생을 괴롭히지 않기로 맹세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여손은 여안을 불효죄로 무고를 해버렸다. 이 소식을 들은 혜강은 사람에 대한 믿음이 무너진 것에 절망하며 절교의 편지를 보냈다.4)

믿고 의지하는 사람만큼 힘이 되는 것이 없다. 자신이 의지하는 사람과 끝까지 함께 가고 싶지만 사람의 마음속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들이 이전부터 결별을 준비해왔을 줄 어떻게 알겠는가? 이별은 아프지만 배신은 쓰라리다.

성무애락(聲無哀樂)

혜강은 정치적으로 불안한 시대를 살았다. 그래서 자신이 믿고 의지할 만한 것을 잡고자 했다. 형의 입대를 만류한 것도 죽림칠현의 친구들과 어울린 것도 믿는 것을 지키려고 움직임이었다. 반면 말로 해도 될 것을 굳이 산도와 여손에게 절교의 편지를 쓴 것도 불안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려는 것이었다. 드러난 것은 다르지만 지키고자 한 것은 같았다.

불안의 시대를 살다 보면 나와 타자의 정체가 뚜렷하게 나뉜다. 그냥 “좀 다른 것 같다”라는 애매한 느낌이 아니라 “확실히 다르다”라는 인식을 갖게 된다. ‘자신’을 지키고자 하는 혜강의 움직임은 단순히 목숨을 지속하기 위함이 아니라, 자신이 추구하고자 하는 정체성을 훼손하지 않으려는 노력이다. 그래서 혜강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는 ‘차이’를 표현했다. 혜강은 절교의 편지를 써서 친구와 자신의 다름을 분명하게 드러냈을 뿐만 아니라 음악과 삶의 방향에 대해서도 자신의 개성을 뚜렷하게 드러냈다.

눈치 보지 않고 개성대로 살아가다 이미지 2

먼저 음악과 관련해서 혜강은 ‘성무애락론(聲無哀樂論)’이라는 흥미로운 글을 썼다. 그는 이 글에서 진객(秦客)과 동야주인(東野主人)의 대화 형식을 빌어서 두 가지 상이한 음악 철학을 나타내고 있다. 진객은 음악(소리)이 사람에게 특정한 감정을 유발시킬 수 있고 나아가 사회적 기풍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본다. 이것은 [예기] ‘악기’ 이래로 주류적인 음악관을 반영하는 견해이다.5) 반면 동야주인은 음악(소리)이 객관적으로 듣기에 좋고 나쁜 형식을 담을 수 있지만 특정한 정서적 반응을 유발시킬 수 없다고 본다. 이는 혜강이 ‘악기’의 음악관을 비판하면서 내세운 새로운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진객의 입장에 따르면 음악(소리)과 마음(심리 현상)은 공명할 수 있는 코드로 이어져 있다. 예컨대 지음(知音)의 고사를 살펴보자. 백아가 금(琴)을 연주하자 종자기가 그 연주에 완전히 공감했다. 하지만 종자기가 죽자 백아는 더 이상 자신의 연주를 알아줄 사람이 없다며 금의 줄을 끊어버렸다. 여기서 백아의 연주는 음악적 형식만이 아니라 심리적 의미를 담아냈고 종자기는 음악을 들으며 그 의미를 한 것이다. 두 사람은 음악을 통해 정서적으로 완전한 공감을 나누고 있는 셈이다. 이를 바탕으로 진객은 좋은 음악이 사회를 선하게 계몽시킬 수 있다는 결론을 이끌어냈다.

한편 동야주인은 백아와 종자기의 고사를 비롯하여 특정한 사람 사이에 있었던 음악과 마음의 교류를 신뢰하지 않는다. 이것은 음악과 관련된 일화를 신비스럽게 보이려고 꾸민 이야기로 본다. 아울러 그는 지역(문화)을 달리 하면 즐거운 노래를 듣고서 사람들이 슬퍼하기도 하고 슬픈 곡소리를 듣고서 사람이 기뻐하기도 하는 관찰을 반례로 제시했다. 즉 특정한 음악과 노래가 반드시 사람들에게 같은 정서적 반응을 유발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동야주인은 음악과 마음의 상관성보다 음악 자체의 화음, 음악적 형식의 탁월성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화음이 탁월하면 사람이 감동하지만 화음이 엉망이면 사람들이 소음으로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성무애락론’은 동야주인이 진객의 음악관을 철저하게 비판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금의 눈으로 보면 진객과 동야주인의 음악관은 누가 맞고 누가 틀리는 결론이 아니라 상이한 음악관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진객은 음악을 음악 외적 목적과 연결시킨다면 동야주인은 사회로부터 음악을 독립시키려는 입장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위진시대의 맥락에서 보면 진객은 음악(소리)은 문자나 그림과 마찬가지로 의미를 전달할 수 있는 매체이다. 이것은 ‘악기’에서 말하는 “예와 악, 형벌과 정치는 궁극적으로 동일하다. 모두 민심을 하나로 만들고 사회 안정을 낳는다.”라는 음악관을 나타낸다.6) 반면 동야주인은 음악을 음악으로 즐길 수 있는 길을 열어젖히고 있는 것이다.

자연을 따르고 개성을 펼쳤던 삶

혜강을 비롯하여 현학(玄學)의 한 흐름을 규정할 때 “월명교이임자연(越名敎而任自然)”이라고 말한다.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명교를 뛰어넘어서 자연에 맡긴다”라는 뜻이다. 보충 설명하면 명교는 도덕, 도덕 가치, 이성, 전통, 관습 등을 가리키고 자연은 성정, 천성, 욕망, 내적 흐름, 내재성 등을 가리킨다. 혜강은 사회가 요구하는 규범을 초월(부정)하고 개인의 자연스러운 욕망에 따라 움직이려고 했다.

이러한 혜강의 특징은 산도의 관직 제의를 거절하는 편지에서도 여과 없이 그대로 드러났다. “매양 탕임금과 무임금을 비판하고 주공과 공자를 홀대했는데, 사회 활동을 하면서도 그런 언행을 그만두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이런 사건이 친구 사이를 넘어서 큰 일로 번지게 되어 세상의 규범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다.”(每非湯武而薄周孔, 在人間不止, 此事會顯, 世敎所不容.)

혜강은 자신의 삶이 탕임금과 무임금, 주공과 공자가 말하는 세계와 거리가 있다는 점을 명확하게 알고 있고 또 그렇게 행동했다. 이러한 언행은 일시적이거나 관심을 끌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의 가치관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관직을 맡더라도 그만둘 생각이 없다는 것이다.7)

“뿌리를 살펴보면 육경은 사람을 억눌러서 이끄는 것을 위주로 하고 본성은 욕망에 따르는 것을 즐거움으로 여긴다. 억눌러서 이끌면 원망에 어긋나지만 욕망에 따르면 자연스럽게 된다. 자연스럽게 되는 것은 억눌러서 이끄는 육경에서 말미암지 않는다. 본성을 온전히 하는 뿌리는 성정을 거스르는 예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인의 도덕은 규범(이성)의 인위성에 바탕을 두므로 참다움을 기르는 핵심이 아니다. 청렴과 사양은 다투고 빼앗는 것에서 생기지 자연스러움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다.” (推其原也, 六經以抑引爲主, 人性以從欲爲歡. 抑引則違其願, 從欲得自然. 然則自然之得, 不由抑引之六經. 全性之本, 不須犯情之禮律. 故仁義務於理僞, 非養眞之要術. 廉讓生於爭奪, 非自然之所出也.)

혜강은 산도의 제안을 거절할 때 세수를 보름에서 한 달 동안이나 하지 않고 그 사이에 찝찝하지 않아도 씻으려 들지 않으며, 소변이 마려워도 참고 방광이 터질 지경이 되어서야 화장실에 간다는 이야기를 했다. 아마 사적인 편지이기에 이렇게 솔직하게 썼을 것이라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사실은 혜강은 산도에게 자신의 평소 버릇을 환기시켜서 “혜강이 원래 저런 사람이었지!”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데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는 자신이 원래부터 반사회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지만 [노자]와 [장자]를 읽으면서 그러한 성향이 한층 더 돌출되었다며 사상적 배경까지 해명한 적이 있다.

이러한 일화를 바탕으로 인용문을 읽으면 글이 한 편의 그림이 된다. 혜강의 이런 특성을 한자어로 방일(放逸)하고 광달(曠達)하다고 하는데, 결국 배포가 크고 얽매임이 없이 제멋대로 구는 야생마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뜻 맞는 친구랑 걸핏하면 싸우며 마음 맞는 사람이랑 밥 먹듯이 헤어지는 망나니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는 그만의 방식으로 따뜻한 인간애의 개성을 담아내려고 했지만 시대가 그것을 담아내지 못한 광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신정근 이미지
신정근 | 성균관대 동양철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한 후 서울대학교대학원에서 석,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성균관대 동양철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마흔, 논어를 읽어야 할 시간] (2011), [인문학 명강, 동양고전](공저, 2013), [불혹, 세상에 혹하지 아니하리라](2013), [신정근 교수의 동양고전이 뭐길래?](2012), [논어](2012), [어느 철학자의 행복한 고생학](2010)] 등이 있고, 역서로는 [소요유, 장자의 미학](공역, 2013), [중국 현대 미학사](공역, 2013), [의경, 동아시아 미학의 거울](공역, 2013) 등 30여 권의 책이 있다. 앞으로 동양 예술미학, 동양 현대철학의 새로운 연구 분야를 개척하고, 인문학과 예술의 결합을 이룬 신인문학 운동을 진행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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