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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림의 문학세계
신경림의 문학세계
1. 시인의 어린 시절
신경림은 1936년 충북 충주에서 태어나 동국대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흔히 신경림을 농민의 아들, 이렇게 알려져 있지만 순수하게 그런 것은 아니다. 개울 하나 건너광산이 있는 집성촌에 딸린 마을에 살았다. 이것은 일반 농촌에서 자란 사람의 경험과는 다른 경험을 그에게 가지게 해주었다. 가령 주위의 문학하는 사람들은 어릴 때 대개가 등잔불에서 자랐는데 그는 전깃불 밑에서 자랐다고 한다. 충주에서 60리쯤 떨어진 곳으로 광산 때문에 전기가 일찍부터 들어왔기 때문이다.
2. 신경림 소개<낮달>(1956), <갈대>(1956)를 발표하여 시인으로 출발한 초기에는 자연을 소재로 하여 삶의 슬픔을 노래한 서정시를 썼다. 시골 농촌에 내려가 10여 년쯤 작품활동을 하지 않다가 1960년대 말에 다시 쓰기 시작하여, 그의 첫 시집은 1971년에야 나오게 되었다.
신경림은 농촌의 현실을 소재로 농민의 소외된 삶을 그린 <농무>(1971)을 발표하면서 우리 문학사에 민중시의 깃발을 올리게 되었다. <농무>로 만해문학상을 받았는데 심사위원이었던 김광섭은 농무에 실린 40여 편의 시는 모두 농촌의 상황시라는 평을 하였다. 신경림은 수상소감에서 “내가 자란 고장은 읍내에서 60리나 떨어져 있는 산골인데, 아버지의 제삿날이 같은 아이들이 10여명이나 있었다. 이런 농촌을 위하여 무엇을 해야겠다고 주먹을 쥐어보는 것이지만, 내 손은 너무 희다는 것을 깨닫는다.”고 말했다. 6.25전쟁으로 인하여 아버지를 잃은 가난한 농촌의 생활을 직접 목격한 신경림은 삶의 구체적 현장에서 우러나온 서정을 노래하고 있다.
신경림은 농민들의 생활 감정을 노래하여 민중에 가까이 다가갔다. 뿐만 아니라 농민들의 궁핍한 삶, 황폐해진 광산, 떠돌이 노동자들, 도시 변두리의 뿌리 없는 삶을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다. 이렇게 민중의 삶을 소재로 역사의식과 민중의식을 시로 형상화한 신경림은 1960년대의 김수영, 신동엽의 뒤를 이은, 1970년대의 대표적 참여시인, 민중시인으로 꼽힌다. 참여시인들은 난해하고 관념적이고 탐미적인 세계를 형상화하는 시인들과는 달리 현실에 관심을 가지고 현실의 모순과 억압받는 민중들의 삶을 형상화한다.시집으로는 <농무>(1973),장시 <남한강>(1987)이 있다.
3. 신경림의 문학세계신경림의 공인된 처녀작은 1956년 <문학예술>지에 추천된 갈대이다. 이 작품을 포함한 초기작 다섯 작품은 첫시집 <농무>에 수록되었기는 하였으나 65년 활동을 재개한 이후 발표된 시들의 강한 인상에 파묻혀 오랫동안 잊혀져왔다. 작가도 자기의 초기 문학세계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다. 김현은 `내면화된 정적 울음‘을 외연적으로 확대하는 길로 갈대를 말했다..
갈대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그의 온몸으로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까맣게 몰랐다.-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그는 몰랐다.
갈대는 소외당하는 민중이다.울음은 무엇인가? 그것은 삶이다. 민중이 산다는 것은 속으로 울고 있다는 것이다. 민중은 온몸으로 살아가고 있다. 현실을 온몸으로 살아가며 흔들리고 상처받는다. 그들은 삶의 상처를 속으로 여미며 울고 있다. 민중의 삶은 흔들리는 갈대이다. 삶이 흔들리는 것은 외부현실, 바람이나 달빛에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울음때문이라는 것은 패배의식에 젖어 있는 태도라고 볼 수 도 있다. 그러나 예전에는 ‘까맣게 몰랐다’였으나 지금은‘알게’된다. 자신의 삶이 흔들리는 것이 다름 아닌 자신의 울음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되는 순간 절망과 패배를 극복할 수 있다. 여기에서 ‘울음’은 가난한 민중들의 울분으로 구체화된다. ‘울음’은 민중의 삶이며, 살에 대한 인식을 표현하는 구체적 방법이다. 갈대의 이미지에서 민중은 흔들리는 약한 존재이지만 세찬 바람에도 꺾이지 않는 힘이 내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신경림은 <갈대>에서 민중의 삶의 애환을 갈대에 비유하여 낮은 목소리로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에 짓눌린 민중의 삶을 똑바로 보여주고 있기에 그의 낮은 어조는 ‘크게’들린다. 신경림은 난해한 시를 거부한다. 난해한 시는 반역사적, 반민중적이므로 신경림은 이런 시를 거부하게 되는 것이다. 그는 민중들에게 쉽게 읽히는 민중들이 이해할 수 있는 시를 써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신경림은 민중들이 쉽게 읽을 수 있는 시를 쓰기 위해서는 첫째, 외래어나 한자를 거부하고 한글전용을 해야하고(제목만은 예외로 하고있다.) 둘째, 우리 고유의 민요적 가락이 드러나야 한다고 했다. 민요 속에는 ‘민족의 한과 설움, 끈질긴 생명력’이 있다. 현대의 난해한 시들은 음악적 요소를 상실하고 있다. 그는 민요적 가락을 되찾음으로써 민중으로부터 사랑받는 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민요적 가락과 민족적 정서를 담고 있는 ‘농무(農舞)’를 소재로 하여, 현대 산업사회에서 소외된 농촌의 실상을 그리고 있다. 초기작 몇 편으로 문단에 이름만 등록하고 서울을 떠난 신경림은 10년 가까이 고향 근처를 떠돌며 실의의 세월을 보내다가 65년부터 다시 시작활동을 복귀한다. 그동안 그 자신도 어렵고 괴로운 생활전선을 전전해야 했지만 자기보다 더 가난하고 억울한 삶들을 목격하고서 그는 문학에 대한 좀더 의식적인 결의를 갖게 되었던 것 같다. 시인 개인의 사사로운 감정이나 예술적 충동을 표현하는 일보다는 공적인 발언의 기회도 능력도 갖지 못한 사람들을 대신해서 그들의 생각과 정서를 자신의 시속에 담겼다는 다집을 그는 거듭했다.
`우리 고장 사람들‘(<시집 뒤에>, <<새재>>)에서 `고생하면서 어렵게 사는 내 이웃들’(<책 뒤에>,<<가난한 사랑 노래>>)로 넓어지고 마침내 삶의 현장에서 열심히 사는 모든 사람들로 보편화된다. 민중시인으로서의 자각과 민중현실에 대한 관심은 그의 시 창작의 일관된 그리고 점증하는 동력으로 작용한다.활동을 재개한 해인 65년에 신경림은 <겨울밤> <산읍일지> <귀로>등 세 편을, 그리고 이듬해에는 <시골 큰집> <원격지> <3월 1일> 등을 발표했고 이어서 듬성듬성 서너 편을 더 선보인 다음 마침내 70년 <<창작과 비평>>에 <눈길>등 다섯 편을 묶어서 내놓았다. 그이 활동이 본격화한 것은 70년대부터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협동조합 방앗간 뒷방에 모여묵 내기 화투를 치고내일은 장날, 장꾼들은 왁자지껄주막집 뜰에서 눈을 턴다.- <겨울밤> 앞부분농무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 달린 가설무대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 빈 운동장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학교 앞 소줏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꽹과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로 나서면따라붙어 악을 쓰는 건 쪼무래기들 뿐처녀애들은 기름집 담벽에 붙어 서서철없이 킬킬대는구나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은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서림이처럼 해해대지만 이까짓산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비료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야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두고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한 다리를 들고 날라리를 불꺼나고개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꺼나
농민들에게 친숙한 농무를 통해 그들의 삶을 조명하였다. 농민들에게 친숙한 소재이기 때문에 쉽게 독자(농민)들에게 읽힐 수 있다. 농무는 농민들의 춤이다. 농무는 농경사회에서 풍년이 되기를 비는 제사의식의 하나였다. 지금은 제의적 요소는 약화되었지만, 농민들은 억눌리고 찌들리 삶을 살면서 농무로 달래고 있다. 율동과 가락으로 어우러진 춤을 추면서 농민들의 허망한 마음을 호소하고 고달픈 삶을 해소하는 농무에는 그들의 즐거움과 서러움이 담겨 있다.
현대사회는 다양해지고 농촌도 변하였다. 신경림은 문명이 발달한 현대사회 속에서 살고 있는 농민들의 삶의 애환을 농무를 추는 이들의 허탈한 심정에 담아 호소하고 있다. 가난과 슬픔, 분노에 얼룩진 농무를 추는 이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농무’는 농민의 삶, 현실 모습이다. 이 시는 농무를 추고 쓴 장면에서 시작하고 있지 않다. 가설무대에서 농무가 끝난 뒤 막이 내리고 구경꾼들도 다 돌아간 뒤의 텅 빈 운동장에서 시작된다. 농무가 끝난 뒤의 허탈감으로 시작한다.
시인의 눈은 농민을 겉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농민들의 삶의 이면을 추적했다. 농무를 추는 농민의 심정을 ‘텅 빈 운동장’으로 제시하고 있다. ‘텅 빈 운동장’은 소외된 농민들의 삶이며 현실이다. 구경꾼들이 가고 난 뒤의 허망함. 다시 시장거리로 나선다. 쪼무래기들과 철없는 처녀들만 쳐다본다. 그래도 농무를 추는 이들은 제 흥에 겨워 거리로 나선다. 꽹과리를 치고 날라리를 불며 가난으로 얼룩진 그들의 삶의 애환을 표출하는 것이다. 고갯짓을 하고 어깨춤을 추는 동안 비료값도 안 나오는 농사도, 발버둥치며 살아가는 것도 다 잊을 수 있다.
가난한 삶의 서러움과 현실의 울분을 호소할 곳이 없다. 농민은 농무를 추며 서러움을 체념하는 것이다. 이 체념의 상태에서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라는 역설적 표현은 ‘체념’과 ‘신명’이 함께 응축되면서 시적 긴장감을 준다. 이 시의 시적 화자가 ‘우리’라고 한 것을 주목하여야 한다. ‘농무’는 농민들, 집단의 정서를 표출하는 ‘마당’이다.
현대사회에서 그 의미가 약화되어가고 있는 ‘농무’를 통하여 농민들의 애환을 표출하였다. 과거의 농무는 농사의 풍요를 기원하는 행사였지만 지금은 그 의미가 퇴색하였을 뿐 아니라 농사일의 흥을 돋워주지도 못한다. 비료값도 나오지 않는 농사를 짓는 농민들에게 농무는 무슨 의의가 있을까? 농민들은 풍요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허탈감’으로 춤을 추고 있다. 신경림은 농민들의 애환이 담긴 농무를 소재로 농촌의 삶의 현장을 조명하였다.70년대 중반 그는 좀더 목적 의식적인 민중문학의 형식 즉 민요의 가락에 관심을 돌린다. 이 관심은 대략 10여 년쯤 지속되는데, 이 기간 중에 나온 시집이 <<새재>>(1979) <<달 넘세>>(1985)와 장편서사시 <<남한강>>(1987) 연작이다. 그이 시가 민중들의 구체적인 생활현실에 기반하여 민중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하기 방식으로서의 시적 화법을 개척한 것이었던 만큼 처음부터 “민요를 방불케 하는 친숙한 가락”(백낙청,<발문>,<<농무>>)를 지니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의 시에는 민요와의 친화성이 처음부터 내재되어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민요가 살아 있는 생활현장을 답사하고 민요의 정신과 형식을 연구함으로써 그의 시가 이룩한 문학적 성과는 평가될 필요가 있다. 시집 <<새재>>는 신경림의 두 번째 시집으로 <<농무>>가 발간된 지 6 년 후인 1979년에 출간되었다. 전체 33편의 구성으로 단형 소품의 서정시 32편에다가 장시 <새재>를 뒷부분에 수록하고 있다.(장시 <새재>는 1987년 발간된 <<남한강>>의 제 1부에 해당된다.)비록 민중적 가락이긴 했지만 슬픔과 쓸쓸함으로 일관되어 있었던 시집 <<농무>>에 비해 <<새재>>는 우선 민중에 의해 이루어져 가는 역사에 대한 시인 자신의 확신과 민중적 삶의 슬기가 한층 고조되어 있다. 그리고 1시집에서 다소 추상적 구조로 얽어져 있던 민중적 가락이 2시집에 와서는 보다 구체적인 민요조의 가락으로 드러나고 있다. 또한 1시집에서의 단편적 서사성이 2시집에 와서는 장편으로서의 호흡과 체격을 갖춘 장시의 규모로 모색되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1983년 초가을부터 1987년 이른 봄에 이르기까지 전국의 노래를 직접 찾아다니며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기록하는 작업에 전념했다. <<민요기행>>이 이러한 직접답사 작업의 산문으로엮어진결과라면 <<달 넘세>>는 본격적인 민요시 창작의 실험적 소산이다.80년대 중반을 넘기면서 신경림은 민요기행을 계속하면서도 민요형식의 창작적 활동을 그만둔다. 민요나 전통시가의 정형적 율격에 얽매이는 것은 시적 상상력의 활달한 전개에 어떤 제약을 가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민요형식과의 결별은 아쉽다.제 5시집 <<길>>(1990)에 수록된 66편의 시작품들은 대다수가 시인 자신이 민요기행을 다니는 과정에서 착상을 얻고 있으므로 시집의 표제에서부터 `기행시집‘으로 못박고 있다. 첫 시집의 시기에서 궁벽한 고향산천의 `뒷방’에 웅크리고서 농촌 주민들을 보았고, 또한 그들의 쓸쓸함을 그렸다
. 이러한 시각이 유년이나 청년시절의 기억을 되새김하는 회고조로 전개된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그의 회고조는 제 4시집까지 계속되어져 왔다. 그러나 제5시집 <<길>>은 더 이상 뒷방이나 산동네에 칩거해 있질 않고 넓디넓은 세상의 길 위로 과감하게 뛰쳐나와서 ‘행만리로(行萬里路)를 통한 구도적 장정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가 수년간을 줄곧 길 위에 떠돌면서 터득한 가슴 소그의 깨달음은 무엇이었을까. 사람들이 대체로 마음 편하게 살기를 좋아한다는 점이라고 말한다.
그의 문학도 사람들에게 편하게 다가가고 그들을 시로써 편하게 만들어 주어야겠다고 다짐한다. 이러한 깨달음은 먼 곳으로 가려면 반드시 가까운 데서부터 시작하고, 높은 데로 올라가려면 반드시 낮은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진리에 관한 깨우침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중용적 도론이라 할 수 있다. 이런 `길 깨달음’은 <<농무>>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 왜냐하면 문학의 소재가 낮고 짓눌린 민중적인 위치에서 찾아야 한다는 확신을 가졌고 또 그것을 시인 자신의 옛 고향 마을 사람들의 찌들릴 대로 찌들린 삶에서 발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신경림이 접어든 문학의 길은 진작 가깝고, 낮은 데서부터 출발하여 드디어는 우리들의! 범속한 상식이 감히 뒤따르지 못하는 멀고 높은 경지에 이미 다다르고 있는 것 같다
.국토의 무수한 길을 두루 돌아다닌 시인 신경림이 마침내 얻게된 소중한 깨달음의 하나는 대체로 다음과 같다
.오늘의 우리 시가 너무 크고 높은 것만 쫓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자잘한 삶의 결, 삶의 얼룩은 다 놓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 있다. 어쩌다 민중을 노래한다면서 민중의 참 삶의 깊은 곳은 보지 못하고 기껏 민중을 이끌고 가는 혹은 이끌고 가는 것처럼 보이는 힘을 힘겹게 뒤쫓아가는 처절한 모습이 우리 시 한 쪽에 보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과연 시가 그토록 욕심을 가지는 것이 올바른 일인가. 시의 값은 오히려 본질적으로 작고 하찮은 것, 못나고 힘없는 것, 보잘 것 없는 것들을 돌보고 감싸안고, 거기에 그치지 않고 스스로 낮고 외로운 자리에 함께 서고, 나아가서 그것들 속의 하나가 되는 데 있는 것이 아닐까. 또 그것이 시의 참 길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