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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미
1959년 출생
1982년 대학 졸업
1992년 뉴욕문학 신인상
2009년 경희해외동포문학상 수상
2010년 윤동주해외동포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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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산에
내리던
눈/
김용미
날이
어둡기도 전인데 온 가족이 집으로 돌아와 있다. 폭설주의보가 현실이 되었고
급기야 그칠 줄 모르고 내리는 눈송이들이 천지를 장악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집 앞의
나무들은 온전할까. 전기가 나가지는
않을까. 가게들은 며칠이나
문을 닫아야 할까. 그 손실은
또 얼마나 클까. 염려가 되는
가운데 오랜만에 함께하는 식구들과의 작은 평화를 즐기기 위해 나는 일찌감치 저녁 밥상을 차린다.
사람들에겐
자연재해라든가 큰 위험을 맞닥뜨리면 서둘러 집으로 찾아드는 본능이 있는 것 같다. 어머니의 자궁
안에 있을 때부터 무의식 속에 형성된 어떤 원형적 이미지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어머니의
뱃속을 벗어난 직후부터 본능적으로 스스로를 따뜻하게 감싸줄 어떤 공간을 찾게 되고 그 공간에 온전히 머무를 때에야 온몸의 긴장을 내려놓고 따뜻한 감정과 더불어 안정감과 평온함을 느낀다. 그 대표적
공간이 집일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사는 동안 그 공간, 곧 집을
마련하기 위해 가장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이기도 한다.
내겐
아주 많은 집들에 대한 기억이 있다, 방문을 열면
앞산이 통째로 건너다보이던 초가에서부터 뒷집에는 독일인 노부부가, 옆집에는 젊은
유대인 가족이 사는 이 집까지 아주 많은 집들로 옮겨 다니며 살았다. 그 중에서도
백마강이 에둘러 흐르던 읍내의 작은 양옥에 대한 기억이 특별하다. 빨강 기와에
파란 양철 대문이 달려 있던 집이었다. 그 집을
떠올리면 어머니한테 들은 이야기가 하나 생각난다.
내가 아주 어릴 적에 우리 가족은 할머니 집에서 같이 살았다. 장남이신 아버지께서
대처로 나가는 대신 고향 근처의 학교를 선택하시어 조부모님을 모시기 원했기 때문이었다. 머슴아저씨까지 열한 식구의
수발드는 일로 하루해가 저물곤 하던 어머니의 일상은 고되었다. 무엇보다 희미한
등잔불 아래 잠이 들어있는 어린 아이들의 미래가 걱정이 되었다. 언젠가는 아이들
교육을 위해 도시로 나가 살 준비를 해야 할 텐데 아버지의 쥐꼬리만 한 월급은 농사짓는 일로 스며들면 그만이었다. 궁리 끝에
어머니는 아무도 몰래 친정마을에 쌀계를 하나 들었고 해마다 정월 마지막 오일장이 서는 날이면 뒷산 중턱에서 외할아버지를 만나 곗돈을 건넸다. 외가는 산길을
두어 시간 가까이 걸어야 하는 곳에 있었다.
어느 해인가 그날도 외할아버지를 만나러 가야하는 날인데 아침부터 눈이 내렸다. 서슬 퍼런
할머니는 오일장에 가시는 것을 포기한 채 안방에서 기척도 없으시고 안타까워진 어머니의 가슴이 두방망이질을 쳤다. 눈 때문에
오시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마음과 이미 도착해 계실 거라는 두 마음이 팽팽한 줄다리기를 했다. 점심상을 물리고
약속시간이 한참이나 지나서야 눈이 잦아들고 할머니는 낮잠에 드신 기색이었다. 어머니는 허둥지둥
뒷산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이미 산속의
길은 지워지고 없었다. 정강이까지 빠지는 눈
때문에 걸음을 옮겨 놓기도 힘이 들었다. 나뭇가지들은 눈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뭉텅뭉텅 눈덩이를 떨어트렸다. 길 잃은
산토끼나 꿩의 날갯짓 때문에 소스라치기도 하며 숨 가쁘게 산 중턱을 향하여 올라갔다. 약속장소인 싸리바위에 다다랐지만 외할아버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늙은 소나무
근처를 서성대던 발자국 몇 개가 외할아버지의 흔적을 말해줄 뿐 산은 고요하기만 했다.
아쉬움에
산마루를 올려다보며 돌아서려는데 늙은 소나무 가지에 묶여 있는 무명 보따리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보따리 안에는
말랑한 수수부꾸미 한 꾸러미가 들어 있었다. 어둠이 빨리
찾아올 겨울 산길이 걱정되어 아쉽게 돌아서면서도 혹시나 올지도 모를 딸을 위해 그 보따리를 두고 가신 것이었으리라. 몇 번이고
산마루를 뒤돌아보며 허둥지둥 산길을 내려오는데 야속하게도 다시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어머니의 젖은
눈썹 위로, 수수부꾸미가 안겨 있는
가슴팍으로, 산기슭의 빈
목화밭으로 천지에 분분하게 날리던 그 날의 눈발을 평생 잊을 수 없다 하셨다. 그날 저녁, 어머니는 부엌문 너머로 그칠 줄 모르고 내리는 뒷산의 눈발을 올려다보며 가마솥전의 밥 눈물 같은 눈물을 흘렸으리라.
그
돈이 기초가 되어 마련한 집이 읍내의 그 빨강 양옥이었다. 담벼락 밑에는
한해살이 꽃들이 차례로 피고 꽃밭 위를 가로지르던 빨랫줄에서는 날마다 맑은 물을 톰방톰방 떨어트리며 빨래들이 개운하게 말라갔다. 장롱 하나, 책장 하나, 앉은뱅이책상 두 개가
큰살림의 전부였던 그 집의 마루는 언제나 반들반들 윤이 났다. 아버지의 자전거가
비스듬히 세워져 있던 그 파란대문의 집은 지금 생각하면 어린아이가 그린 그림처럼 볼품없고 작은 집이었다. 하지만 다섯
자식을 온전히 품어 재우던 그 공간, 그 집에서의
어머니는 내 기억 속에서 가장 행복한 모습이었다. 그 집은
젊고 푸른 어머니가 살던 집이었다.
집이란
무엇인가. 현대인들 대다수가
그렇듯 나도 집을 소유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부지런히 살아왔던 때가 있었다. 집이 행복의
목적이라도 되는 듯이 말이다. 그리고 지금
나는 다시 집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본다. 집이란 시간의
흔적과 가족의 사랑으로 한 켜 한 켜 쌓아올린 기억의 탑과 같은 것이었다. 내가 그
작은 양옥을 생각하면 일년초 꽃잎들이 한꺼번에 피어나듯이, 칸나보다 작고
달리아보다 조금 컸던 다섯 형제들의 올망졸망했던 모습이 떠오르며 미소가 지어지듯이, 무형의 견고한
추억들이 쌓여 완성되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집이었다. 오늘날의 집은
가족이 아늑하게 머무는 공간의 의미를 넘어 투자와 부의 척도가 되어가고 있는 듯하다. 집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우리에게 행복을 주는 수단에 불과할 뿐인데 의미가 변질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리하여 우리는
그 행복을 거꾸로 찾아가고 있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나의 집에 대한 기억여행은 파란 양철대문 집을 떠나 빗소리 따갑던 도시의 함석지붕 밑 자취방과 한남동 언덕의 시댁을 떠돌다가 태평양을 건너온다. 첫아이를 낳았던 뉴욕의 낡은 아파트와 뒤뜰에 감나무 두 그루를 심어둔 이 집을 거쳐 다시 호박꽃 같은 등잔불이 가물거리던 초가로 돌아가 있다.
구글(google)에서
제공하는 위성사진 지도에 외가와 친가의 주소를 넣어본다. 차령산맥의 높고 낮은
산과 구릉 사이에 별처럼 박혀 있는 두 동네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인다. 반세기 전의
정월 하순 어느 날, 회색 솜두루마기
안에 따스한 수수부꾸미를 품고, 말랑한 그리움을
안고 그 눈 내리는 산길을 더듬어 가시던 외할아버지의 모습이 그 산맥 사이 어디엔가 있을 것만 같다.
창밖에는
그날처럼 하염없이 눈이 내리고 메밀꽃 같기도 하고 목화꽃 같기도 한 눈송이 몇 개가 유리창에 달라붙어 방안을 기웃거리고 있는 밤, 혹시 그
산에도 그날처럼 눈이 내리고 있지는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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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김 용미
가게 일을
마치고 차에 오른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여러 갈래이다. 출근시간에 이용하는 넓고
빠른 길도 있고 중간 속도를 내며 갈 수 있는 길이 있으며 포토맥강변도로 위쪽으로 나 있는 아주 좁고 느린 옛길이 있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그 마지막 길을 택해 집으로 돌아가곤 한다. 그것은 동살에
집을 나서 그 해가 이울 때에야 집으로 돌아가는 내 지루한 일상에 대한 작은 일탈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길은
제한속도도 느리고 구부러짐이 심한데다 아주 오래된 외다리도 하나 놓여 있다. 그래서 어쩌다
다리 앞에서 신호등에라도 걸리는 날이면 건너편의 차들이 건너오기를 기다리느라 다소 지루한 기분을 견뎌야 하는 길이다. 하지만 기다리는
동안 나뭇가지 사이로 매달려 있는 빨간 신호등을 바라보며 홍시를 연상해 본다거나 노루꼬리만큼 남아 있던 해가 서쪽 숲으로 간단없이 넘어가 버리는 걸 목격하는 일은 그리 나쁘지 않다.
오늘도 그
길을 밟아 집으로 돌아간다. 풀잎들도 나무들도
저마다의 그림자를 거둬들이는 시각,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 위에 있고 하늘엔 노을만이 붉다. 그 붉은
저녁노을에 머리를 감고 있는 풀숲의 산수유 열매를 보니 가을은 돌이킬 수 없이 깊어져 있는 것 같다. 불현듯 찾아왔다가
다시 불현듯 떠나가는 계절이 가을 아니던가. 오른편 숲에서
튀어나온 잿빛 다람쥐 한 마리가 길을 건널 셈인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망설이고 있다. 애초의 길은
저런 다람쥐나 토끼 같은 작은 동물을 쫓아 조금 더 큰 동물이 가고 다시 사람들이 그 뒤를 쫓아가며 생겨났을 것이다.
구부러진 길을
달리다보면 길을 향해 허리를 굽히고 있는 나무들을 자주 만난다. 오래 전
사람들은 이 길을 내며 나무 한 그루, 바위 하나
때문에 에둘러 길을 냈으리라. 하지만 이제
사람들은 곧고 빠른 새 길을 내기 위해 산의 허리를 자르거나 물줄기를 돌려놓는 일을 서슴지 않는다.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라는 하버드대학 교수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의 에세이집을 읽은 적이 있다. 그 책은
제목만으로도 말해주는 게 많았다. 지금 내가
달리고 있는 길은 방향이 맞는지, 속도만을 따라
떠밀리듯 살아오지는 않았는지, 가끔은 멈춰
서서 생각해봐야 할 일이다. 늙은 갈참나무의
깍정이를 떠난 열매가 차의 등으로 투둑,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저녁, 앞서거나 뒤서는
차들도 서두르는 법이 없어 보이는 이 길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갈 수 있어서 좋다.
길과 나란히 어깨를 겯고 나 있는 산책로에는 언제나 익숙한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곤 한다. 전기 줄에
한쪽 어깨를 베어내준 자작나무 밑을 지나며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 나온 여자를 스치고 유아용 자전거를 뒤에 매단 채 한가로이 자전거 페달을 밟는 남자를 스쳐 지난다. 늙은 백양나무들이
하늘을 이고 있는 공원 어귀에서 오늘도 어김없이 중년의 부부를 만난다. 남편을 의지하고
천천히 걸음을 떼어놓고 있는 아내의 모습이 지난여름보다 많이 야위어 있다. 계절이 깊어지고
나면 저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두툼한 스웨터를
걸친 아내의 모습을 차의 뒷거울로 한 번 더 확인하며 강변도로와 만나는 다음 삼거리를 향해 살짝 페달을 밟는다.
세 번째
삼거리에 다다르면 강변도로를 타고 온 차들을 만난다. 신호등이 없는
길에서 만난 차들은 짧은 조우를 마친 뒤 서두를 것도 없이 차례차례 다시 길을 간다. 큰 도로에서
만나는 차들은 경쟁의 대상이 되기 십상이지만 한적한 길에서 만나는 차들은 어쩐지 정답게 느껴진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가던 차량이 갈림길에서 다른 방향으로 접어들면 살짝 섭섭하기까지 하다. 옛길에는 삼거리가
많았었다. 그래서인지 삼거리가 많은
이 길을 가다 보면 마음이 아련해지며 어릴 적에 걸어 다녔던 길들이 생각나곤 한다.
봄비에 싸리꽃잎이
눈처럼 떨어지고 가을이면 도꼬마리들이 장난치며 옷에 들러붙던 그 산길들이며 노란 탱자울타리를 끼고 나 있던 고샅길이 생각난다. 어른들이 작대기로
이슬을 털며 앞장서주시던 들길이 생각나고 말가웃의 곡식이나 보리 질금 두어 됫박, 흙 묻은
푸성귀를 머리에 인 할머니가 걸어가던 신작로도 자주 기억이 난다. 미루나무 잎들이
하얗게 배를 뒤집는 쪽을 보고 바람의 방향을 알아채고, 베어낸 벼
포기 위에 쌓인 눈이 하얀 밥사발 같다고 생각하며 자라던 그 길들 위에서 내 감성의 기초가 세워질 수 있었던 건 축복이 아니었을까. 구부러지고 어눌했던 그
길들이 나를 키워냈다 하여도 지나친 말이 아니리라.
큰길로 합해지기
직전에 한 번 더 돌아야 하는 모퉁이 집의 뜰을 가득 메우고 있던 백일홍의 검붉은 꽃잎들이 꽃받침 위에서 그대로 시들어가고 있다. 백일홍들이 꽃 피우기를
그만둔 것만 보아도 가을은 깊을 대로 깊어지고 있는 셈이다.
길은 좁고 구부러져 있을수록 많을 것들을 품고 간다. 구부러진 길가에는
많은 생명들이 산다. 나무나 풀, 하물며 질경이 같은 것들도 그 길가에 엎드려 살며 사람들의 발자국이나 차의 바퀴에 묻어 작은 생명을 퍼트리며 산다. 물길도 그
흐름이 빠른 곳에서는 물고기나 물풀 같은 생명들을 키우지 못한다. 사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넓고 빠른
길로만 살아온 사람들은 모를 것이다. 실패를 모르고
살아온 사람들은 알 수가 없을 것이다. 세상에는 좁고
구부러진 길들이 허다하고 그 길을 힘들게 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래서 타인을
향한 따뜻한 시선과 사랑과 배려 같은 걸 배울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
행여 내
삶의 길이 좁고 구부러져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길을 가는 동안 볼 수 있는 것들을 생각하면서 길을 가면 좋을 것 같다. 좁고 구부러지고
어두운 길에서만 보이는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가령 북서쪽으로
기우는 해 아래 흔들리는 풀꽃이라든가 생의 마침표를 찍기 위해 땅으로 떨어져 내리는 무수한 잎들, 허리가 살짝
휘인 초승달을 바라볼 수 있는 건 천천히 가는 길 위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