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하고 절박한 것이 세 끼의 식사라면 그것이 준비되고
저장되고 그것을 음식으로 준비하는 모든 도구들이 모여 있는 곳이 바로 부엌입니다.
그 부엌에서의 자신의 모습이야말로 한편의 시 같다고 방금 쓰다가 놔둔 미완의 시
같다고 말합니다. 시를 개념으로 설명하지 않고 상황으로 환기시키고 있는 이 장면이
인상적입니다. 개념은 명료한 듯하나 추상의 골격만 있고, 상황은 불투명한 듯하나
체의 살을 지니고 있습니다. 고요 속의 그릇들은 자신의 서가에 있는 책들보다 한 수
라고 생각합니다. 왜곡된 편견과 논리에 의하여 한쪽에 소외된 채 웅크려 있던 부엌이
품위있는 꽃처럼, 만개한 꽃처럼, 가스레인지의 불이 타는 불꽃처럼, 시인의 간절하고
공경어린 시심에 엄숙하고도 멋진 모습으로 되살아나고 있는 것입니다. 부엍은 한 권의
'은색시집'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