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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회 신인문학상 수필부문 수상작/ 이명희, 경화 밀스테드

Author
문학
Date
2021-01-16 20:43
Views
729

수필 -가작 


나의 아버지

-이명희



  아들은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김치가 외할머니 김치라고 지금도 입버릇처럼 말하고는 한다.

오래전 김장을 하셨다며 김치를 가져가라는 엄마의 전화에 부랴부랴 김치 통을 가지고 친정으로 향했다김치를 담고 무겁다고 아버지께서 전철역까지 들어다 주신다.

 번에 가는 버스가 없어져서 여간 불편한  아니다지하철을  번이나 갈아타고 다시 버스를 타야 하니  무거운 김치 통을 어떻게 운반할까 마음은 내심 걱정으로 가득하다.

아버지께서 무료승차권을 건네주시며  이거면 차비  번만 내면 되지.? 하신다.

“아버지 그거 걸리면 벌금 30 인데그냥 제가 카드로 찍고 들어가며 되죠.

“아니다  푼이라도 아껴야지”

평생 절약으로 몸이 베이신 아버지군인이셨던 아버지는 마흔일곱 너무도 젊은 나이에 제대 하시고 오랫동안 세상과 등졌던 낯선 곳에서 싸우시느라 다시 오랜 세월을 보내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이 마흔 일곱 너무도 젊은 나이였다내게도  나이에 아이들은 한창 자라는 시기였다아버지가 제대 하시던   여고 2학년이었다

집안의 장녀로  어깨의 짐이 무겁기만 했었다아버지는 밤이면 사과 장사를엄마는 길거리에 좌판을 벌이고 어묵을 팔고 낮에는 파출부를 다니셨다

그런 나는 수학여행  입고  옷이 없다며 철없이  투정을 했었는데아버지 갑자기 제대하시고 얼마나 어려운 형편인지 미처 깨닫지 못했던 시절 . 이제  생각해 보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었는지

나중에 아버지는  생활의 경험을 토대로 건축업 일을 하시게 되었다.

형편이 조금씩 나아졌지만,  여전히 힘들기만 했던 지난날들,

아버지의 지하철   장에 지난 시간이 떠올라  마음으로 울고 있었다.

 내가 다섯  되던해 아버지는 연년생 여동생과 나보다   아래였던 남동생을 무릎에 앉히시고 노래를 불러 주시고는 했다.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뜰에는 반짝이는  모래밭

뒷문 밖에는  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푸른 제복을 입은 사람만 보면 아버지,아버지 하며 따라나서고 일요일만 되면 영화를 좋아하셨던 아버지는 어린  팔에 앉고 극장에 가시고는 했단다.

아마도 내가 영화를 좋아하는 것은 그때 아버지의 영향 탓은 아닐까 싶다.

동네 가설극장에서 처음 보았던 영화가 천마산의 결투였다옛날엔 영화가 끝나면 티켓을 추첨해서 밀가루를 주고는 했는데 한번은 밀가루가 당첨되어서 아버지는 밀가루를 머리에 이고 오시면서 싱글벙글하셨다.

내가  살이 되든  우리 집이 생겼다온통 초가로 지붕을 덮고 있었는데

부모님은 당시 유행하던 슬레트로 지붕을 얹고 마루를 깔고 목욕탕이란 것을 만들었다앞마당엔 옥수수를 심고 토끼도 키워  매일 토끼 먹이를 주는 재미에 매달리고는 했다하지만 밤이 되면 화장실이 무서워 동생을 데리고 후레쉬 빛을 비추며 밖에서 기다리게 하고는 했다.

여름 장마가 시작되면 아버지는 시뻘건 황토물이 흐르는 개울가로 오물을 버리러 가셨다 장군이 달래  장군인가 ?  어린 나는 무엇이 좋은지 비를 맞으며 황토물 개울가로 구경을 하러 가고는 했다넘실대는 파도처럼 무서운 물살을 바라보며 어린  무슨 생각을 했었을까?

 가을이 깊어 가면 엄마는 군인이셨던 아버지 덕에 김장을  포기 이상을 하셔야 했다.

군에서 도우러 나온 사병 아저씨와 배추를 절이고 들어 나르고그런 내게 아버진 영웅  이상이었던  같다아버지와는 거의 떨어져 지내는 시간이 많았다여고를 서울로 올라오면서아버지는 한탄강 부근 부대로 전근을 하러 가시게 되었다당시 한창 유행하던 전우라는 드라마를 그곳에서 자주 촬영을 하고는 했다촬영 장면을 보겠다며 걸어서  시간씩 걸리는 군부대를 걷다가 지치면 지나가는 군용 트럭을 세워 태워 달라고는 했었다여름 방학이 되면 동생과  아버지가 계시는 군부대 BOQ 에서 지내며 냇가로 가서 아버지 군복을 빨고 물가에 앉아 어린 시절을 생각하며 노래를 부르고 물장구를 치며 놀았다

밤이면 북쪽과 가까워서 전파를 방해한다며 라디오도 제대로 들리지 않아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는 했다.  

 아버지를  빼닮은 남동생이 육사를 지원했을  엄마의 반대가 무척 심하셨다내가 이제껏 살아오면서 28 이사를 했다 . 아들마저 군인으로 만들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남동생은 결국 대학에서 ROTC 지원했고 강원도 간성이란 곳에서 소대장 임무를 무사히 마쳤다소위 임관을 하던  양어깨에 계급장을 달아주시며 평생을 하사관으로 지내셨던 아버지는 아들의 소위 임관에 얼마나 흐뭇해하시던지

아버지나의 아버지친정에  때마다 “우리   왔냐.? 생전 자식들한테 소리 한번 지르신  없던  아버지오래오래 건강하시길예순을 바라보는   딸은 여전히 아버지의 팔베게가 그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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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장려상


기억

-경화 밀스테드




친구들과 대화 도중  친구가 내가 말을 하려는 순간 치고 들어왔다‘재가  그러지? 라고 약간 기분 나빠지려는 순간 미안하다며 덧붙였다.

“사실은 요즘 잊어버려말하려고 했던 것을 빨리 뱉아 내지 않으면 번개 치듯이 사라져버려중요하게 말하려  것이라  말을 끊었어.미안.

잊어버리는 것은 나도 마찬가지다한달  장을 보고 물건 하나를 차에  것이 기억나 꺼내기 위해  키를 찿다가 포기했다  저녁 퇴근하고 들어오는 남편이 내게 소리쳤다.

“열쇠가  대문에 꽂혀 있어?

한번은 저녁거리를 준비하려고 마켓에  적이 있었다이것 저것 고르느라 정신이 없는데 사람 좋아 보이는 젊은 여자가 내게 반갑게 인사를 건네 왔다“누구세요? 라고 묻자 그녀가 말했다“아유 섭섭해요농담도  하세요.  그녀를 당황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급히 반갑다고 인사하고 그녀와 헤어졌다  이상 야채를 고를  없었다 자리에서 망부석이 되어 나의 뇌를  가동시켰다그녀가 누구인지 알아 내는데 40분이 걸렸다그녀는 내가 종종 머리를 하러 가는 헤어 살롱 주인 여자였다 일로 나는 충격을 받았고 의사를 찿아가 치매 검사를 했다아무 이상이 없었다의사 말이 나이 들어 가면서 가끔 생기는 현상이라고 아무렇지 않은  설명했다.

엄마가 이상했다이상하다는 것은 알았지만 어느 누구도 치매라고 생각하진 못했다어느    엄마가 떴다 하면 그녀 주위에 크고 작은 사건들이 아주 자주 일어나기 시작했다냄비에 음식이 시커멓게 타고 연기로 켁켁거릴 때까지 냄비를 가스불에 올려 놓은 것을 모르고엄마 지갑이 냉장고에서 발견되고어디에서 구린내가 나서 보면 옷을 입은  변을 보고도 알아 채지 못하고여름인데 덥다면서 겨울 오리털 잠바를 입고 있었다 거리에서 모르는 사람을 보고 손자 이름을 부르곤 하였다요리 도중 된장국에 소금  봉지를  부어 놓곤 하였다.  ‘설마 아닐 거야’ 간절한 마음으로 병원을 찿았지만 엄마는 치매 판정을 받았다

 가족이 합심하여 엄마를 모셨지만 한계에 부닥쳤다그때부터 가족들 간의 불협화음이 시작되었다편안한 각자의 일상 생활을  이상 영위할  없게  아들며느리사위손자손녀들은 기가 막힌 이유들을 들어 엄마를 모실  없다고 말했다   나도 포함되어 있었다누구의 말인지 기억할  없지만  사람이 말했다

“어쩌면 치매라서 다행이에요만일  졸증이나 중풍으로 몸이 마비되어 병수발을 했으면 어쩔 뻔했어요본인이 제일 괴롭지요양로원으로 모시는  제일 좋아요일단 기억이 없으니 적어도 괴롭지는 않을  에요.

부모는  자식을  거느리지만 자식들은  부모를  모신다는 말은  우리를 두고  말이었다.

엄마는 양로원으로 갔다우리들은 각자의 어깨에 짊어졌던  짐이 없어지자  가분 함을 만끽했다처음엔 매일 방문하다가 일주일에 다섯 번이 세번이 되고 세번이 한번이 되고 한달에   번으로 방문이 줄어 들었다그러던 어느  사건이 터졌다같은 방을 쓰던 노인이 엄마 때문에 밤마다 잠을   없게 되자 액자로 엄마의 머리를 내리쳤다노인은 감옥으로 엄마는 병원에서 깨진 머리를 치료하고 집으로 돌아왔다엄마는 밤만 되면 자식들의 이름을 목이 터져라 부르며 맨발로 양로원 복도를 날이  때까지 돌아다녔다 한다.  직원의 표현을 빌리면 유령처럼 오싹했다고 한다.

막내 삼촌이 말했다.

“내가 너희 엄마 덕택에 대학 교육까지 받았다이제  늦기 전에 갚아 야지.

엄마는 은퇴  삼촌 집에서  년을  사시고 세상을 떠나셨다장례식을 끝내고 엄마를 묻고   삼촌이 말하셨다

“엄마가 온전한 정신으로 돌아올  마다 적어 두었던 말이 있다.

종이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아버지 먼저 보내고 너희 들이 어릴   저것들이 언제 커서 사람 노릇하나 싶었다 월이 빠르더라너희들이  크고 나니 내가 늙어 있더라고맙고 사랑한다그리고 엄마 옥색 저고리 안에 돈이 있다나를 위해 제사 지내지 말아라.

엄마 옥색 저고리 안에서 만사천불이 나왔다평소에 드렸던 용돈을 모으셨던 모양이다.

우리들은 뒤늦게  늦은 후회를 했지만 소용없었다엄마는 떠나셨다 길을어느 누구의 배웅도  받고.

가끔씩 엄마 생각이 나면 가슴이 미어진다바쁜 일상을 핑계로 망각의 늪으로 떠나보낸 엄마가 불현듯 가슴에서  뛰어나온다 가락 끝이 오그라드는 미안함에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그냥 우두커니  자리에 서서 호흡을 가라 앉힌다.  살아 생전  모시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망자의 서슬 퍼런 원망이 살아있는 나의  몸을 쪼아 대는  같다괴로운 순간에서 도망치려고 주위를 돌아보다가 엄마의 눈과 마주친다거실 탁자에 놓인 흑백사진 속의 젊은 시절의 엄마는 정갈한 모습으로 귀엽게 미소 짓고 있었다나는 현기증을 느끼며 엄마의 사진을 잠시 돌려 놓았다그리고  밖으로 나오지 않는  마디를 혀로 굴리며 속삭였다.

“엄마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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