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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적 공통가치의 힘/김백겸 시인

Author
mimi
Date
2010-09-13 21:00
Views
14497

 


문화적 공통가치의 힘 

 

 
‘예술의 의미와 힘’에 대해 시인들은 잘 알고 작품을 쓰는지 나는 가끔 궁굼하다. 이런 내용들은 미학자나 예술사가들만의
전유물인가. 정의(正義)를 붙이지 않아도 작가는 스스로 느끼고 알기 때문에 필요 없는 것일까. 작가의 예술관(세계관, 형이상학)은
개념화되기 이전의 ‘삶에 대한 감성’에서 출발한다. 작가의 ‘인식의 주형(鑄型)’은 삶에 대한 감성의 내용을 다르게 받아들이고
다른 이미지들을 프린트 한다. 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문화로부터 세뇌된 ‘인식의 지형(地形)’과 공통가치를 공유한다. ‘예술의
의미와 힘’은 개인적인 시야와 문화적공통가치의 시야사이의 자장(磁場)에서 창작되는 것 같다. 근대 혹은 당대의 예술은 개인적인
시야가 도드라진 ‘표현주의’를 중시하지만 그 작품이 ‘문화적 공통가치의 시야’를 획득하지 못하면 당대 혹은 다음세대에서 버려진다.
우리가 ‘고전’으로 부르는 작품은 ‘문화적 공통가치의 시야’를 획득해서 인간이 달성하고자 하는 삶의 구체적 비전을 보여준다.
시인들은 개인의 욕망과 정열에 따라 작품을 창작할 뿐 작품의 생존여부는 운에 맡긴다는 생각이 주류인 것 같다. 주식투자가가 경제
환경을 공부해서 확률을 높이듯이 시인은 과거와 당대의 문화지형을 공부할 필요가 있다. 인류가 추구해온 문화와 예술의 가치가
당대현실에 어떻게 적용되고 모습이 달라지는지 예민한 센스가 필요하다. 다른 시각으로 쓴 시인 세 명의 시를 살펴보자.

 

 

 



  1.김영승

 

 

   부평시장역

 

  뭐가 그렇게 우스워?

  하고 물으면

  더 웃는다 소녀들은


  시체들도 그런다

  그래서 화장터 너머

  꽃이 피는 것이다


  生의 세계에서는

  感傷도 많고

  울분도 있지만


  시체는 그 자체로

  換骨奪胎한 幻影

  그저 法悅이다


  썩거나 타면

  그나마 없어지니

  더 法悅인


  法悅이다

 

  그것도 모르고

  벌벌 떨고

  이런 저런 일에

  더 벌벌 떤다

 

  그래서

  뭐가 우스워?

  하고 물으면

  더 웃는다   




  (격월간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2010년 5~6월호)


 



 
이십대에 법열(法悅)이라는 단어를 처음 접하고 무슨 말인가 궁굼했던 적이 있다. ‘참된 이치를 깨달았을 때 느끼는 황홀과
기쁨’이라는 사전적 정의가 있다. 결국 ‘앎의 기쁨’이라는 얘기이다. 꼭 종교적 진리가 아니더라도 사상가의 이론이나 위대한 미술품
장엄한 음악등을 듣고 시야가 넓어지는 경험을 법열(法悅)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김영승은 희로애락을 그친 시체를 열반에 이른 ‘법열’의 상태로 묘사했다. “썩거나 타면 /그나마 없어지니 /더 法悅인
//法悅이다”라는 표현에서는 존재하지 않음이 최고의 지선至善이다. “그것도 모르고 /벌벌 떨고 /이런 저런 일에 더 벌벌 떤다”는
자신(중생)의 삶을 반성하고 있는데 ‘반성’은 화자의 반성일 뿐, “소녀”는 생의 욕망과 희망이 가득한 청춘이고 죽음은 안중에
없다. 김영승은 역설과 풍자의 시들에 능하다. 말하고 싶은 주제를 뒤집고 다시 뒤집는 그의 시작법은 독자들에게 재미를 선사한다.

 
이 시를 보고 법열의 제일원인인 몸에 대해 생각해본다. 나는 일원론자이므로 몸과 세계는 한 몸의 다른 형태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지금까지의 밝혀진 지식으로는 이 세계는 에너지와 정보가 이상한 형태로 결합한 만다라의 세상 같다. 관찰자가 참여해서
구성하는 사건과 운동의 복잡계인데 뒤집으면 ‘꿈’과도 같다. 물리적으로는 이상한 끌개(attractor, 원인)에 의해 자체적으로
회귀(regrssion)패턴을 보이는데 시간의 경과를 감안하면 8자 곡선의 영구순환운동을 한다. 전체적으로는 그 값이
하나인데(不增不減) 제한된 시간으로 보면 시작과 끝, 인과현상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인도사상에서는 이 상태를 ‘시바의 춤’이라고
불렀다.

 
인간의 고급이성은 세계의 운동과 개체의 죽음이라는 현상을 이해하나 몸은 죽음을 이해하는 것 같지 않다. 우리의 몸은
자신(ego)이 영원히 산다고 믿는다. ‘생의 맹목’이라는 표현도 있듯이 ‘영생永生’을 바라는 인간의 욕망이 종교와 다른 세계에
대한 믿음을 낳는다. 인간의 지식이란 정치함의 차이일 뿐 사실은 다 ‘지도’에 불과하다. 내가 인용한 과학지식조차도 ‘지도’에
불과하다. 과학과 예술이 없는 지구행성의 다른 종들은 ‘지도’없이도 개체와 생명을 훌륭하게 유지한다. ‘지식’이란 인간의 욕망이
세계를 다루기 위한 ‘도구’적 지식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법열’도 지식이 그린 개념인데 불가에서는 성전일구(聲前一句)요
본래면목(本來面目)인 지식이전의 여래멸의(如來密意)를 깨닫는 기쁨이라하지만 직접 경험 외에는 증명할 수가 없다. 선생들이 믿고
따르라 하니 후학은 그런가 보다 할 수 밖에 없다

 
뒤집기 선수인 작자의 의도와 맞는지는 모르겠으나 이 시에서 아름다움 점은 내 생각에 ‘소녀의 웃음’이다. 소녀는 지식이 없이
몸이 시키는 대로(세계운동 프로그램 일환인 DNA 설계대로) 세상과 타자를 보고 웃는다. 이 상태가 진리가 아닐까. “感傷도 많고
/울분도 있지만” 열반적정으로 돌아간 시체보다는 생의 욕망을 가진 소녀가 아름답다(적어도 내 몸의 눈으로는). 꿈일지도 모르지만
자연이 설계한 눈 그대로 세상을 보는게 속 편하다. 지식이 증가할수록 만년 역사의 인류문화가 그린 세계지도라는 것이 계속
오류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으므로.

 

 

 







  2.정원숙

 

 

  子夜

 



  백석은 자야를 사랑하고 자야는 백석을 사랑해서

  나는 백석을 사랑하고 백석은 나를 모르므로

  나의 자야子夜는 시름시름 깊어간다.


  나는 저류로 흐르는 마지막 몸짓을 대기에 소루하고

  나의 족적은 백년보다 긴 나중의 길을 걷는다.


  이별의 힘은 얼마나 나를 단단하게 만들었던가

  사랑은 무한대로 줄 수 있는 자아의 혈血이 아니었던가


  자야가 깊어갈수록

  내 가슴은 단애가 깃한 사바나가 된다.

  입에선 단내가 나고 건조한 열풍이 나를 왜곡한다.


  새로 한 시를 알리는 괘종시계는 관객 없는

  내 글의 연극의 시작을 알린다.


  나는 백지 위에 초원을 세우고 무덤과 운무를 띄우고

  폭풍이 몰아치는 언덕을 축성한다.


  그 속에는 백석도 없고 자야도 없지만

  나는 그 텅 빈 생을 건너갔다 되돌아오는 일을 반복한다.


  무관심한 무덤들은 가릉빈가가 되고 싶어

  무수한 풀들을 제 머리 위에 키우지만

  나는 결코 주류가 되고 싶지 않다.


  나는 백지 같은 자야에 내 혈의 글을 써나간다.

  ‘나는 진정코 육체의 삶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백석과 자야가 헤어졌어도

  그들의 정신의 힘은 풀린 적 없기에

  자야가 깊어가면

  내 자아도 이 난청의 연극에서 벗어날 수 있기에

  (웹진《시인광장》 2010년 7월호)

 


 
정원숙은 백석과 백석의 애인 ‘자야’에 시인의 사랑을 투사하고 불멸하는 시인의 시정신을 드러내고자 했다. 시인의 자부심이
대단하다. 시인과 기생의 사랑이란 낭만적인 스토리가 후세인들에게 영감을 자극하나보다. 신분 때문에 헤어지는 결말도 조선의 최경창과
홍랑의 사랑이야기와 비슷하다. 나중에 요정의 마담으로 출세한 ‘자야’가 돌아가신 법정스님에게 요정 대원각을 시주하면서 남긴
‘백억원이 백석의 시 한줄 만도 못하다’는 말도 인구에 회자가 됐다. 이런 마력을 발휘한 힘이 시와 사랑이 얽혀진 인간심정에
있으니 ‘시란 성정(性情)을 드러낸 것이다’라는 동양시학에서 철학적 함의를 뺀 말로 설명이 가능하다.

 
이 시에서는 시인이 패쉬티쉬(pastiche)한 ‘자야(子夜)’라는 단어가 중요하다. 백석이 이백의 시
‘자야오가(子夜吳歌)’에서 따온 이름인데 ‘깊은 밤’이라는 뜻이니 운치가 있다. 음양오행으로도 이 말의 깊은 뜻을 설명할 수가
있다. 자시(子時)는 23시 30분-1시 30분인데(동경시를 사용하는 우리나라에서는 30분 늦다) 오행중 수(水)의 기운이 극심할
때다. 하루의 시작이며 생명의 시작으로도 본다. 나무로는 씨앗의 상태인데 한의학에서는 인간의 신장과 생식기능을 수水의 기운으로
본다. 다시 말하면 에로티시즘 (씨앗을 남기고자 하는 욕망) 의 기운이 극심할 때다. 이백의 시 ‘한 밤중에 들려오는 오나라의
노래’처럼 전장에 보낸 님에 대한 그리움과 탄식이 절로 나오는 시각이다. 그래서 예나 지금이나 연인에게 사랑을 고백할 때는 ‘달
밝은 한밤중’이 가장 적합한 때다.

 
시란 대낮의 현실에서 얻지 못한 욕망을 밤의 환상에서 얻고자 하는 행위이다. 시란 가상이며 꿈의 행위이기에 생명의 입장에서는
‘함정’일 수도 있다. 자연의 입장에서는 생식을 해서 자손을 퍼뜨리는 행위가 중요하지 ‘시’라는 먼 길을 돌아가는 ‘정신’의
행위가 중요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자는 “나는 백지 같은 자야에 내 혈의 글을 써나간다./ ‘나는 진정코 육체의 삶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라는 결의를 내 비치고 있다.

 
시인이란 “백석과 자야가 헤어졌어도 /그들의 정신의 힘은 풀린 적 없기에”라는 사랑을 믿는 사람이지만 시간이 인간의 정신과
시인의 표현마저 지운다. 그래서 사랑에 관한한 시는 자연이라는 대타자에 저항하는 불길이 된다. 이런 시편들에서는 죽음을 극복하고자
하는 에로스의 불길이 인간의 운명과 관련하여 감동을 준다. 새삼 생각해 보니 나르시스가 시의 운명이다. 시간의 거울에 비친
연인(내 얼굴의 이상형)과 하나 되기를 꿈꾸지만 주체(자아)의 힘이 강할수록 타자의 힘도 강해진다. 시란 나를 넘어서 말하고자
하는 무의식의 욕망에 관한 편지이지만 ‘잃어버린 편지(진실)’는 언제나 다시 나에게로 돌아온다.

 

 

 






  3.오은

 


 

  용의자

 



  테이블 위에 우유를 엎질렀습니다. 허공을 찌르는 몇 개의 방울들을 지켜보는 동안, 컵에서 주르르 잉여가 흘렀습니다. 최후의 관객이 되고 싶었습니다. 동공이 하얘질 때까지 현장을 지키고 싶었습니다.

 


 
테이블의 다리는 네 개. 우유가 쏟아질 때 네 다리는 한꺼번에 떨었습니다. 네 다리는 통째로 생각합니다. 맞은편에 있는 네게
다가갈 수 있을까. 그러기엔 서로의 마음이 맞지 않습니다. 옆에 있는 네게 넌지시 고백해볼까. 그러기엔 몸뚱이가 너무 튼튼합니다.
이럴 때 그림자라도 하나씩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커튼이 열리면 테이블은 본때를 보여줄 겁니다. 자신의 결이 얼마나 보드라운지, 태양을 마주하는 데 얼마나 거리낌 없는지,
광합성에 대한 기억이 얼마나 또렷한지. 네 다리는 테이블을 한껏 받들어줍니다. 그림자는 한 방향으로 잘 뻗어 있습니다. 테이블의
얼굴에 나이테가 하나 더 그려집니다.

 


 
햇빛이 테이블 위로 왈카닥 쏟아집니다. 얼굴이 아름다워집니다. 그림자가 짙어집니다. 테이블은 자신에게 찾아온 기회를 단단히
붙잡을 용의가 있습니다. 아마도 그럴 겁니다. 네 다리는 알고 있습니다. 빛을 뿜는 데보다는 품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쏟아야
한다는 것.

 


  네 다리는 자신을 쓰다듬어줄 사람이 없다는 게 문득 쓸쓸합니다.

 


  누가 우유를 엎질렀을까요. 누가 우유를 사다놓았을까요. 누가 젖소를 독려했을까요. 누가 테이블의 몸뚱이에 대못을 쾅쾅 박았을까요. 테이블은 원래 네발짐승이었을지도 모르는데.

 


 
한 명의 나와 세 명의 너는 두 발로 서서 생각하는 겁니다. 우유의 유통기한을, 젖소의 혐의를, 햇빛의 따사로움을. 정작 아래
있어서 자기 자신의 얼굴도, 엎질러진 우유도 보지 못했으면서. 다리는, 다리는, 네 다리는, 너의 다리는…….
 







(계간 『시와 시』 2010년 여름호)

 



 
시를 읽고 사물을 사랑하는 방식(시선의 방식)에 관한 생각을 했다. 감정이입(Empathy)은 인간의 사회생활을 위해 진화했다고
한다. 타인의 얼굴과 행위를 보고 의도를 아는 것은 수렵과 협동농업에서 생존의 필수조건이므로. 그보다 앞서 말 못하는 아기의
눈만 보고도 뭘 원하는지 알아야 하는 어미의 본능이 더 중요할 수도 있겠다. 인간이 영화나 연극 소설의 주인공이 겪는 가상현실을
동일 체험으로 느낄 수 있는 능력도 감정이입 때문이다. 인간과 동물에 대한 감정이입은 보편능력이지만 포유류가 아닌 식물이나
무생물에 대한 감정이입은 예술가의 특수능력이다.

 
응시와 관찰은 감정이입의 기본 전제다. 동물학자 콘래드 로렌츠는 ‘동물들의 행동을 이해하려면 동물의 아름다움을 감식할 수 있는
미적 감각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사물에 대한 시선의 방식도 동일한 말을 적용할 수 있다. 오은이 실내의 네다리를 가진 테이블과
엎질러진 우유를 대상으로 인간이 느끼는 미적사유와 감정으로 처리한 시적능력이 대단하다. 자연이나 동물이 아닌 매우 건조한
일상용품이어서 그렇다. 21세기 신세대는 상품이 더 친숙한 환경이고 과거세대의 자연과 같은 ‘가이아’역할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침묵하는 사물이 서로를 향해 대화하고 있다는 가상공간을 설정하고 그 그림과 스토리가 생생한 점이 이 시의 장점이다.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이 성공한 이유는 동물들의 행태가 인간의 행동과 방식으로 우화의 재미를 선사한 점에 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테이블과 우유와 태양과 그림자의 대화와 교감도 그에 못지 않다. 단 동일방식의 사물에 대한 공감능력이 없는 독자에게는 이 시가
지루할 수도 있겠다.

 
(세잔느의 ‘사과’ 그림을 연상하면 된다. 이 그림을 제대로 이해하는데는 지적 공감능력이 필요하다. 사과가 배후 풍경과 어떻게
교감하는지를 알아차리는 미학인데 그 ‘아름다움’에 몇 천 억의 경매가가 붙어있다. 상상력만 본다면 시인들의 상상이나 화가의
상상이나 같은 레벨이며 내가 보기에 어떤 작품들은 시가 더 우수한데 왜 화가들의 상상미학에만 고가의 돈을 내는지 현 자본시스템이
문제다. )

 
미진해서 덧붙이자면 이 시는 ‘감정이입’이 이루어졌지만 ‘감정의 통제’가 잘 이루어진 경우다. 심리학에서 이런 능력은
‘상위인지’라고 부르는데 자신의 감정을 제 3의 눈으로 냉정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경우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런 지적통찰을
좋아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시란 ‘심장에서 심장으로 전달하는 불꽃’이라는 생각이 우세해서다.

 

 

 
‘예술의 목적은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보여주는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과거의 종교예술이나 사회주의나라의
선전예술(Propaganda)과는 다르게 근대와 자본주의 미학이 반영된 주장이다. 어떤 태도가 올바른가 하는 예술의 ‘윤리적
위치’는 예술가의 ‘형이상학적 견해’에 달려있다. 동시에 개인과 사회가 어떤 작품에 감명을 받는가 하는 수용미학도 독자와 사회의
‘형이상학적 견해’에 달려있다. 예술가의 운명은 당대의 주된 사회적 가치와 개인이 열망하는 예술적 이상가치가 조화하느냐
길항하는가에 달려있다. 비극적 사실은 예술작품이 당대가치와 조화한다고 해서 훌륭한 작품이 탄생한다는 보장이 없다는데 있다. 당대에
인정받은 작품들이 후대에 버려지고 당대에 인정받지 못한 작품들이 후대에 살아난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전으로 살아남은
작품들은 긴 시간의 문화와 인류의 무의식에 스민 ‘보편적 형이상학’을 반영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 시인들도 역사와
예술사를 통해 인류가 어떤 가치를 지양해 왔는지 공부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시인자신이 갖는 문화인식의 지형과 시 창작 태도의
위치를 알 수도 있다. 그러나 ‘아는 것’과 창작에 반영하는 능력은 또 다른 문제이다. 문화인으로서의 예술사가와 비평가가 예술가가
될 수 없는 이유이다. 심미적 가치와 보편적 문화이데올로기가 동시에 충족되는 ‘위대한 시’들은 결국 시인의 재능과 포괄적
문화의지가 반영된 시인의 가치관에 달려있다
.

 

 

 

 

김백겸 시인

 

 

1953
년 대전에서 출생. 충남대학교 경영학과와 경영대학원 졸업. 1983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기상예보〉가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비를 주제로한 서정별곡』, 『가슴에 앉힌 산 하나』, 『북소리』, 『비밀 방』, 『비밀정원』등이 있음. 대전시인협회상,
충남시인협회상 수상. 현재 웹진 『시인광장』主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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